펠레의 산토스가 방한 했던 1972년 당시 현장 풍경

한국 국대 선수들과 사진 찍는 펠레. 사진 가운데 선수가 펠레
유베 방한 때문에 시끄러운 와중에 레알 축구계의 끝판왕이신 분이 방한 했을 때는 어땠나, 중앙도서관에서 자료 한 번 찾아봤는데, 펠레는 역시 펠레군요. 같은 포르투갈어권 국가 소속인데도 47년 후의 호날두와는 큰 차이가 확 느껴졌습니다.
1972년 펠레의 산토스가 방한해서 한국 국대와 경기한 적이 있는데 산토스의 3:2 승리로 끝났습니다.
마라도나라는 '희대의 축구 신동'이 등장하기 전까지 펠레라는 이름은 축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단어였다. 축구 영웅, 축구 천재, 금세기 최고의 축구 스타, 검은 진주... 어떤 낱말로도 그를 표현할 수 없게 되자 결국 세계는 펠레에게 '축구 황제'라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최고의 칭호를 부여했다.
그의 경기를 가까이서 직접 본 사람부터, 텔레비젼으로 보았던 사람, 또는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펠레의 신화는 더 아름답고 더 화려하게 채색되어 지금도 전 세계 축구팬들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지고 있다.
1972년 6월 2일 저녁 7시.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은 경기 시작전부터 후끈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초여름밤의 더운 날씨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입구와 통로까지 비집고 들어선 3만 관중에겐 축구 황제 펠레의 경기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어쩌면 생애 최고의 영광스러운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설레임과 흥분이 소용돌이쳤다.
운동장에서 파는 물건에는 전부 펠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모자는 펠레 모자, 손수건은 펠레 손수건, 펠레 방한 특집 기사를 다룬 신문은 펠레 방석으로 불리며 자리깔개용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펠레의 산토스팀은 아래위 흰 유니폼, 한국대표팀(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상비군이란 명칭을 썼다)은 상의 붉은색, 하의 흰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나섰다.
골키퍼 이세연, 수비에 김호, 김호곤, 박영태, 김경중, 미드필더에 이차만, 고재욱, 공격엔 이회택(동북고), 박이천(동북고), 박수덕, 차범근이 이날의 스타팅 멤버였다.펠레를 누가 마크할 것인가가 장안의 관심거리였는데 노련한 수비수 김호와 부지런한 이차만 두 선수에게 책임이 주어졌다.
예상대로 전반 초반부터 브라질 산토스팀의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볼이 발끝에 착착 달라붙는 탄력에다 뒤에도 눈이 달린 듯한 마술사 같은 개인기에 관중들은 그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시아 최강을 자부하는 한국 선수들이었지만 그들 앞에서는 공만 따라다니고 있었다. 제 카를로스, 알신도, 예즈 등 산토스의 공격 트리오가 펑펑 슛을 쏘아대는 통에 골키퍼 이세연은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한국 공격진이 이따금 슛을 쏘아보지만 그들에 비한다면 슛도 아니었다.
결국 전반 43분 산토스의 선취골이 터졌다. 레오의 센터링을 받아 알신도가 강슛을 성공시킨 것.
하지만 3만 관중과 전국의 TV 시청자들에겐 한국이 이기고 지는 것이 관심사가 아니었다. 백넘버 10번을 단 검은 피부의 선수가 어떻게 공을 차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반 내내 펠레는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다.
두 명의 수비수, 특히 이차만이 펠레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밀착마크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고의적인 반칙으로 펠레의 약을 올렸다.
그러자 전반이 끝나갈 무렵 참다못한 관중석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야! 우리가 펠레 묘기 보러왔지 너 수비하는 거 보러 왔냐?"
게다가 주심 김영진씨마저 어설픈 애국심으로 한국 선수들의 반칙을 눈감아 주는 바람에 산토스 선수들의 항의가 잇따랐다. 매너 좋기로 소문난 펠레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후반에 들어가자 펠레는 전반의 부진을 의식한 듯 활발하게 움직였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의 볼컨트롤과 발재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후반 13분, 예즈가 왼쪽에서 강한 땅볼 센터링을 보내자 펠레는 오른발로 스톱시킨 뒤 눈깜짝할 사이에 오른발 땅볼 강슛을 쏘았다. 전광석화! 번개가 번쩍 치는 듯한 짧은 순간이 지나자 그제서야 모두 골인이 됐음을 알았다.
관중들은 마치 한국이 골을 넣기라도 한 것처럼 좋아라고 만세를 불렀다.
펠레의 생애통산 1204번째 골은 이렇게 한국에서 기록됐다.
두 골을 먹고나서야 이대로 질수는 없다는 듯 한국의 투지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펠레의 멋진 골도 봤겠다 관중들도 이제 한국의 선전에 열광적인 함성을 보냈다. 후반 17분과 19분 고재욱과 박이천(동북고)이 잇따라 결정적인 찬스를 잡았으나 아깝게 빗나갔다.
그러나 잠시뒤인 후반 24분, 교체로 들어간 땅딸보 김진국의 패스를 받아 19살의 차범근이 골에리어 오른쪽에서 강슛으로 기어코 만회골을 뽑았다.
열화와 같은 응원을 등에 업는 한국은 불과 2분뒤 동점골을 뽑아 운동장을 숫제 용광로로 만들어 버린다. 차범근의 스루패스를 받은 이회택(동북고)이 단독 드리블로 수비를 돌파한 뒤 골키퍼와 1대 1로 맞선 상태에서 혼신의 힘을 다한 슈팅을 골네트에 꽂은 것이다.
경기전 박병석 감독(동북고)은 "2골 이상의 실력차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우리가 후반에 밀어부친다면 1골 정도는 넣을수 있다"고 말 했는데 기대 이상의 선전이었다.
그러나 세계 최강 브라질 산토스를 상대로 두골을 넣었다는 흥분이 지나쳤을까. 후반 종료 4분을 남기고 결국 결승골을 허용하고 만다. 장발을 휘날리며 경기 내내 그라운드를 누비던 미드필더 레오가 30미터 거리에서 멋진 롱슛을 성공시켰다. 천하의 골키퍼 이세연도 어찌할 수가 없는 완벽한 슛이었다.
2 대 3의 스코어는 한국이 최대한 접근한 실력의 차이였다.
경기가 끝나자 관중들은 모두 일어서 양팀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특히 펠레에게는 더 큰 환호와 박수가 이어졌다. 2중 3중의 마크를 당하면서도 냉정함과 여유를 잃지 않았고, 오히려 한국선수가 쓰러지면 다가가 일으켜 세워주는 매너, 항상 미소를 띠며 경기에 임하는 그의 천진난만한 얼굴이야말로 축구 황제는 기량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국 축구팬에게 보여주었다.
펠레 방한 경기는 올드팬들에게는 아련한 추억과 함께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명승부로 남을 것이다. '특히 동대문운동장 주변 학교출신 전문 담치기꾼들에게는 가장 가치있었던 담치기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출처: 축구협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축구가족> 1998년 10월호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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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u93 2019.07.30정말 호날두랑 비교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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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abi Alonso 2019.07.30당연히 해야할 것들이 재평가가 되고있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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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coAlarcón 2019.07.30이 글만 보면 내한 친선경기의 정석과도 같은 모습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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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 Iker 2019.07.30펠레는 산토스 시절에 워낙 세계적으로 투어를 많이 돌아서 이런 모습은 아마 몸에 베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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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directory_arrow_right CR 2019.07.30*@San Iker 날두도 투어는 아닐지라도 세계적으로 많이 방문을 했을텐데....이번일을 계기로 호날두의 인내심과 예의가 한계를 보여주네요... 이 글을 보고 펠레랑 더 비교하게 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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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승현 2019.07.30펠레가 한국온건 몰랐네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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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콜리 2019.07.30역대 넘버원 다운 모습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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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남이 2019.07.30펠레는 쌓아놓은 커리어 실력 뿐만 아니라 그냥 상징성때문에 앞으로 그 누구도 넘길수 없을거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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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real7 2019.07.30비교하긴싫지만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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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úl7 2019.07.30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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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_11 2019.07.30잘 읽었습니당. 혹시 퍼가도 될까요? 출처는 꼭 밝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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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directory_arrow_right 아케미호무라 2019.07.30@RYU_11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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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nedine\' Zidane 2019.07.31축구의 마이클 조던같은 선수도 저렇게 하는데 호우 정도가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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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히오 라모스 2019.07.31세상에... 1972년에 펠레 소속팀인 산토스가 방한해서 한국 국대와
경기를 했다니.. 여태 이 사실을 몰랐네..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