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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끽해야 디 스테파노급 : 디 스테파노는 이무기가 아니다.

에르난도 2014.07.15 20:35 조회 5,348 추천 31
1.
한국의 해외 축구 팬덤 사이에서 디 스테파노에 대한 취급은 그리 좋지 못합니다. 그야 전설적인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야 별 이견이 없지만,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의미와 가치가 실려 있지 않은 공치사에 가깝습니다. 애당초 스테파노는 커뮤니티에서 잘 운위되지 않습니다. 기껏 그가 운위되는 경우의 8할은 이런 식입니다.

"월드컵 우승 못하면 끽해야 디 스테파노 급."

그리하여, 디 스테파뇨에 대해 별 관심도 애정도 없는 이들에 의해, 멀쩡하디 멀쩡한, 아니,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할만큼, 그 위가 더 이상 없는 천외천의 높은 곳에서 거닐던 디 스테파노가 별안간에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마냥 갑자기 땅바닥에 쳐박혀서 실패자가 되고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인양 낙인찍히죠.

이것은 억울한 일이 아니라 가소로운 일입니다. 억울함은 약자가 강자에게 억압당하는 데에서 오는 감정인 반면, 가소로움은 강자가 약자로부터 조롱당하는 데에서 오는 감정입니다. 억울함은 호소하는 반면, 가소로움은 재롱을 즐깁니다. 다시 말해, 이 글은 하소연하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그저 '끽해야 디 스테파노'라는 언명이 재롱 수준에 불과함을 지적하고자 하는 글입니다.


* 이를테면 이런 거.



2.
2차대전 직후에는 그 이후처럼 대륙 내지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대회가 없었습니다. 각각 국가별/지역별로 분산되어 그들만의 리그를 펼칠 따름이었으며, 국제적인 교류의 장은 제한적이었죠. <세계축구>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며, 축구의 중세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지리적 인근성에 근거하여 산발적으로 소규모나마 국제적인 대회들이 만들어지고, 그것들이 대륙단위의 대회로 서서히 통합되어 가는 양상을 보입니다. 월드컵이 1950년에 재개되고, 유러피언 컵과 인터 시티 페어스 컵이 1955년에 발족되며, 유로컵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컵 위너스 컵이 1960년부터 시작된 것이라든가, 유럽 최우수 선수상인 발롱도르 같은 경우도 1956년에 처음으로 수여된 것과 같은 것이 당대의 흐름을 말해줍니다. 스테파노는 이러한 <세계 축구>의 형성기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월드스타를 논하자면 응당 유럽에서는 푸슈카시를, 남미에서는 디 스테파노를 꼽아야 할 것입니다.


* 군웅할거. 개판잼..



3.
흔히 디 스테파노는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경력만으로 기억됩니다만, 그는 그 이전에도 이미 세계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21세였던 1947년에 리베르 플라테가 30전에서 22승 4무 4패 90득점 37실점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했고, 이때 디 스테파노는 30경기에서 27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획득합니다(2위 르네 폰토니는 23골). 약관의 나이에 이미 팀득점의 30%를 책임질 수 있었다는 거죠.

같은 해에 아르헨티나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현재의 코파 아메리카의 전신인 남아메리카 챔피언쉽에 출전했는데, 이를 보면 국가 전체적인 차원에서 디 스테파노의 역량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 대회에서 스테파노는 7경기에서 6골을 기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끕니다. 이는 전체 득점 2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다음 해인 1948년에는 리그 2위에 그쳤습니다만, 지금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동일한 성격의 대회인 남아메리카 챔피언쉽 오브 챔피언스에 출전했습니다. 이 대회는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열렸고, 아르헨티나/브라질/우루과이/볼리비아/칠레/에콰도르/페루 7개국에서 리그 우승팀 내지 주요팀이 각 하나씩 참가하여 총 7개팀 - 이중 4개팀이 자국 리그 우승팀이었고, 1개팀은 준우승팀, 2개팀은 주州 대회 우승팀이었습니다 - 이 무려 풀리그를 펼쳤습니다. 이 대회에서 스테파노의 리베르 플라테는 4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4승 2무를 기록한 바스코 다 가마에게 승점 1점 차로 아깝게 우승을 내줍니다. 디 스테파노는 6경기에서 4골을 기록하였습니다.



4.
이후에는 콜롬비아 리그의 미요나리오스로 이적하여 4시즌을 보내고, 3번의 우승과 1번의 준우승을 맛 보며, 두 차례 득점왕을 차지합니다. 공식기록으로는 121경기 109골이 확인되며, 친선경기까지 포함하면 297경기 262골을 넣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시기에 열린 국제적인 대회로는 스몰 클럽 월드컵(원어로는 페퀘냐 코파 델 문도)이란 대회가 있는데, 1952년에는 미요나리오스와 더불어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 브라질의 보타포구, 베네수엘라의 라 살레 등 4팀이 참가하여 라운드 로빈을 2번 돌렸습니다. 각 팀은 6전을 치렀고, 미요나리오스는 2승 3무 1패로 2승 4무를 기록한 레알 마드리드와 보타포구에 이어 3위에 그치지만 디 스테파노는 6경기에서 6골을 기록합니다. 다음 해인 1953년에는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 아르헨티나의 리베르 플라테, 오스트리아의 라피드 빈 등 3팀이 참가했고, 미요나리오스가 우승을 차지했으며, 디 스테파노는 3경기에서 3득점을 합니다.

1952년 스몰 클럽 월드컵이 열리기 4달 전인 3월 31일, 미요나리오스와 레알 마드리드는 마드리드에서 한 차례의 경기를 더 가진 바 있습니다. 이 원정 경기에서 디 스테파노는 멀티골을 기록하며 팀의 4-2 승리를 이끕니다. 이 경기를 통해 미요나리오스는 스페인 언론으로부터 세계 최강팀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이것이 디 스테파노의 레알 행의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 남만왕 맹...아니 남미왕 스테파노.



5.
디 스테파노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11시즌 동안 뛰면서 396경기 동안 307골을 넣었고, 8번의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 트로피와 5번의 유러피언 컵 트로피를 들어 올렸으며, 발롱도르를 2번 수상하는 등 맹위를 떨쳤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러피언 컵 5연패는 그와 레알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경력입니다.

간과되곤 하는 사실이지만, 디 스테파노는 이미 레알 입성 당시에 만 27세였으며, 유러피언 컵이 처음 열렸을 때에는 29세였 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축구 선수들은 26~27세에 정점에 도달하며, 현대의 선수들은 과거의 선수들에 비해 만개하는 시기는 빨라졌고, 노쇠하는 시기도 늦어지며 보다 완만한 에이징 커브를 그리게 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다시 말해 과거의 선수들이 현대의 선수들에 비해 신체적인 하락이 훨씬 빨리 진행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디 스테파노는 유러피언컵이 시작된 시점에서 자신의 정점을 지난 상태였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차범근이 26세라는 늦은 나이에 분데스리가에 데뷔했음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준 것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곤 하는데, 디 스테파노는 그보다도 훨씬 더 늦은 나이에 비로소 제 놀 물을 만났다는 이야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파노는 유러피언 컵을 5번 연속으로 제패합니다. 그것도 팀의 독보적인 No.1으로.


* 23세 즈음에 만개하여 26~27 즈음에 정점에 도달하며, 이후 하락세를 그리지만 30까지는 경사가 완만하고, 30 이후에는 급격히 떨어진다.

기록을 보면 더욱 경이롭죠. 디 스테파노는 유러피언 컵을 5연패 하는 동안 모든 결승전에서 빠짐없이 골을 넣었으며, 마지막 1959-60 시즌에는 프랑크푸르트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터뜨리며 5번의 결승전에서 총 7골을 기록했습니다. 유러피언 컵에서의 통산 누적 득점은 58경기 49골인데, 당시의 유러피언 컵이 16강부터 녹아웃 토너먼트로 진행되었다는 점, 즉 지금의 챔피언스리그에서 조별리그가 삭제된 형태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녹아웃 토너먼트 득점이 49골인 셈입니다. 참고로 현역 선수 중 녹아웃 토너먼트에서 최다골을 기록하고 있는 선수는 34골의 호날두죠.


* 34세의 나이로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해트트릭을 터뜨리다.


* 노익장의 전설

이 당시의 유러피언 컵에 대해 흔히 가지는 편견은, 어중이떠중이들이 참가하여 아무나 우승할 수 있는 대회가 아니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55-56 시즌의 초대 대회 때에도 이미 각 리그의 우승팀들이 주축이 되어 16개국의 강자들이 자웅을 가렸으며, 56-57시즌부터는 점차 참가 리그가 늘어나 예선까지 치러야 할 정도였죠.

물론 현재의 챔피언스리그에 비해 유러피언 컵의 규모와 난이도는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일단 본선 참가팀 자체가 16팀에서 32팀으로 증가했으며, 각 리그의 우승팀만이 출전하는 것이 아니라 리그 랭킹에 따라 빅리그의 유수 강호들이 총출동하죠. 게다가 녹아웃 토너먼트 이전에 조별리그를 거치기 때문에 우승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경기 수도 7경기에서 13경기로 증가했고요. 챔피언스리그에서 연속 우승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가디언 지의 저명한 풋볼 칼럼니스트 조나단 윌슨 역시 유러피언 컵과 챔피언스 리그의 차이를 지적합니다.

http://www.theguardian.com/football/blog/2013/may/21/champions-league-super-clubs

"이전의 강팀은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힘든 매치업을 2회 이상 할 필요가 없었지만, 지금, 가장 강한 국가들에서 다수의 참가로 인해, 그것은 3회 미만이기 어렵고, 종종 4회는 되며, 만약 팀이 조별 리그에서 불운하다면, 5회에서 6회조차 될 수 있다. 더 많은 강팀들이 존재하며 그것은 더 큰 패배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그 점에서 현재의 챔피언스리그와 50년대 유러피언 컵의 우승의 가치는 분명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챔피언스리그와 비교할 때의 이야기고, 유러피언 컵 내에서는 시즌이나 시기에 따른 차등을 두기 어렵습니다. 어찌되었든 유러피언 컵은 출범할 때부터 유럽 최고의 리그였으며, 그보다 위상이 높은 리그는 유럽 내에 존재하지 않았고, 유러피언 컵의 말미인 80년대에든지 태동기인 50년대에든지 대회 규모나 진행 방식 등에서 큰 차이는 없습니다. 따라서, 만약 레알 마드리드의 유러피언 컵 5연패가 폄하받아야 한다면, 아약스나 바이언의 3연패, 리버풀이나 벤피카나 노팅험 포레스트나 밀란의 백투백 우승 등도 똑같이 폄하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 번도 그렇게 하는 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6.
그가 월드컵을 우승하지 못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디 스테파노가 월드컵에서 뛸 기회가 없었던 것 뿐이지 월드컵에서 뛸 실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더군다나, 스테파뇨가 젊었던 시절의 월드컵은 아직 그 규격와 외연이 정립되지 않은 대회였습니다. 1950년 월드컵, 그러니까 디 스테파노가 24살 이었을 때만 하더라도 월드컵이 2차대전으로 중단된지 12년이나 되었던 터라, 이후에도 월드컵이 이어질지 어떨지 불투명한 시점이었습니다. 실제로 본선 직전에 많은 팀들이 무단으로 불참 통보를 하는 바람에,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16개 팀이 아니라 13개 팀만으로 대회를 치러야 했고, 그로 인해 대진표에 구멍이 숭숭 나기도 했죠. 심지어 우루과이 같은 경우에는 단 한 경기만 치르고 결선리그(4강 풀리그)에 진출했으며, 총 4경기만을 치르고 우승했죠(이때 브라질과의 마지막 경기가 그 유명한 마라카낭의 비극입니다.). 스테파뇨가 28살이었던 1954년 월드컵 같은 경우도 지역 예선 참가팀이 전세계를 합해봐야 40개국도 안 되었고, 녹아웃 토너먼트 대진 같은 경우에도 각 조의 1위와 다른 조의 2위를 크로스 시켜 대진을 붙인 게 아니라 조1위는 조1위끼리, 조2위는 조2위끼리 붙이는, 다시 말해 조 1위를 하면 손해를 보는 졸속적인 시스템을 운영했고요.

이렇듯, 도때기 시장배 시기의 월드컵을 우승 못했다고, 그것도 나가서 패배하고 온 것도 아니고 아예 나간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월드컵 경력을 가지고 깎아내리는 것은 누가봐도 온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임요환을 두고서 MSL을 우승 한 적 없고, 그 전신인 KPGA 투어도 1번 밖에 우승하지 못했으니 후대 선수들에 못 미치는 선수였다고 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7.
디 스테파노의 레알 마드리드 시절의 트로피로 유러피언 컵만이 회자됩니다만, 그 외에도 많은 국제적인 대회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먼저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의 우승팀들이 참가하던 대회인 라틴 컵에서, 스테파노의 레알 마드리드는 1955년과 1957년 두 차례의 우승을 차지합니다. 1955년에는 레알 외에 AC 밀란과 스타드 드 렝스, 벨레넨스스가 참가했으며, 1957년에는 벤피카와 밀란, 생테티엔이 참가했습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스몰 클럽 월드컵이 1956년에 5번째로 열렸는데, 이때는 대회 규모가 보다 확장되어 레알/로마/포르투/바스코 다 가마 등 4개의 클럽이 참가했고, 라운드 로빈이 2번 돌아가서 각 클럽당 6경기를 치렀습니다. 이때 레알은 4승 1무 1패 14득점 9실점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 당시 존재하는 대회란 대회는 다 나가서 어지간하면 다 우승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가 우승하지 못한 대회는 그가 출전하지 않은 대회 뿐이라고 말해도 크게 허언은 아닙니다.


* 김수겸이 이야기하면 허세스럽지만, 디 스테파노가 말한다면야 뭐...



8.
앞서 언급했듯이, 발롱도르는 1956년부터 수여되기 시작했습니다. 디 스테파노의 나이 서른일 때이죠. 즉 디 스테파노는 발롱도르보다 오래된 선수입니다. 평범한 선수 같으면 한 번도 받지 못했겠죠. 아니, 평범과는 거리가 먼, 축구사를 논할 때에 반드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스테파노의 팀 동료 푸슈카시조차도 33살의 나이에 2위에 머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런데 디 스테파노는 1957년과 59년에 발롱도르를 두 번이나 수상하죠. 서른을 넘기고 발롱도르를 두 번이나 접수한 선수는 지금까지 스테파노 뿐입니다. 게다가 초대 시상식이 열린 1956년에도 3표 차로 2위에 올랐는데, 이때의 수상자는 41세의, 이미 전성기가 지난 스탠리 매튜스였습니다. 즉, 스탠리 매튜스의 공헌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초대 수상이 돌아갔을 뿐, 이 시즌의 유럽 최고의 선수는 디 스테파노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프랑스 풋볼은 1989년에 디 스테파노에게 수퍼 발롱도르, 즉 명예 발롱도르를 수여했습니다. 지금까지 수퍼 발롱도르를 받은 것은 단 3명인데, 디 스테파노 외의 수상자로는 1996년의 마라도나와 2013년의 펠레가 있습니다. 이들은 남미 출신이었기에 발롱도르를 수상하지 못한 선수들이니, 이들에게 수퍼 발롱도르를 수여하는 것은 이해하기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미 두 번이나 발롱도르를 수상한 바 있는, 굳이 추가로 명예상을 주지 않아도 될 스테파노에게, 프랑스 풋볼은 발롱도르가 수여된 이래 처음으로 수퍼 발롱도르라는 특별상을 제정하면서까지 추가로 상을 안겨주죠. 이를 볼 때, 프랑스 풋볼에서 얼마나 디 스테파노를 높게 평가했는지 알만 합니다.


* 디 스테파노가 수상한 두 차례의 발롱도르와 수퍼 발롱도르.



9.
이렇듯 디 스테파노는 그저 워낙 오래 전의, 미디어의 수혜를 입기 이전 시대의, 그리고 세계 축구의 태동기에 있던 선수인지라 자료가 많지 않기도 하고, 후대의 선수들과 동일한 기준에 의해 논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평가가 이루어지는 자리에서 논외로 간주되고 그에 따라 주목을 덜 받을 뿐입 니다. 진지하게 스테파노를 복마전의 선수 비교의 토론장으로 놓고 나오면 그 누구에게도 밀릴 것이 없습니다. 농구로 치면 빌 러셀이나 윌트 체임벌린, 복싱으로 치면 슈거 레이 로빈슨 같은 선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올타임 급의 독보적인 클럽팀을 축조하고, 그 팀에서 독보적인 비중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독보성을 단시간이 아니라 10년에 가까운 독보인 기간 동안 이어나갔던, 즉 매 경기 매 달 매 시즌마다 <유아독존 그 자체>였던 인물은 축구사에서 단 세 명도 꼽기 힘듭니다. 더불어, 1년을 호령한 선수는 흔하고, 3년을 호령한 선수는 드물지 않고, 5년을 호령한 선수는 간혹 있지만, 20년을 호령한 선수는 스테파노 이외에는 팀동료였던 푸슈카시 정도 뿐입니다.

직접적인 비교가 쉽지 않을 때에는 상대비교가 고하를 가늠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예컨대 푸슈카시는 스테파노보다는 약간 아래로 평가되곤 합니다. 두 사람이 같은 팀에서 뛸 때의 팀내 비중에 있어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푸슈카시조차도 펠레나 마라도나 바로 밑에 있다는, 74월드컵 결승 단 한 경기만 더 이겼다면 넥스트 펠레가 되었을 것이라는 크라위프와 비교해도 우위에 설법한 요소가 많습니다. 푸슈카시가 속해있던 50년대 헝가리 골든팀이든 70년대 아약스든 축구사적인 의의나 당대 최강팀으로서의 지위에서나 특출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리고 푸슈카시나 크라위프나 비슷하게 독보적인 팀내 입지를 가졌죠. 크라위프가 60년대 말-70년대 초의 아이콘이었다면, 푸슈카시는 2차대전 후 처음으로 등장한 최초의 월드스타였죠. 후대에 MVP로 추존될 정도로 월드컵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지만 우승에 실패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고요. 그런데 푸슈카시는 헝가리에서 끝난 게 아니라 31살에 레알에 입단하여 약 8년 간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죠. 이쯤 되면 푸슈카시를 두고 최소 크라위프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지경입니다. 이런 푸슈카시를 팀내 2인자로 밀어낸 것이 디 스테파노였고요.

이런 전설을 두고서 '끽해야 디 스테파노 급' 운운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아카데미 작품상 못 받으면 시민케인 급, 노벨 문학상 못 받으면 보르헤스 급이라는 이야기와 조금도 다르지 않죠. 대관절 '디 스테파노 급'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로 생각하기에 저런 형용모순의 문장을 구사하면서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지 의문일 따름입니다.




* 오손 웰즈, 보르헤스, 디 스테파노에게 돌아가면서 뺨 한 대씩 맞아야 정신 차릴래?




RIP. 그에게 행해지는 사자모욕을 바라보며 천국에서 코웃음치고 있지 않을런지.



출처:http://www.soccerline.co.kr/slboard/view.php?uid=1989148465& page=1&code=columnboard&keyfield=&key=&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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