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북) 챔피언스 리그 결승 단상
1. 양팀의 준비 상황
경기에 들어가기 앞서, 체력적으로는 레알이 비교적 우세한 상황으로 보이긴 했습니다. 리그 우승을 조기에 결정짓고, 선수들의 체력안배가 용이했으며, 전격적인 로테이션이 아닌, 경기감각을 살리는 로테이션을 행함으로서 결승전에 모든 포커스를 맞출 수 있었습니다.
반면, 리버풀의 경우 끝까지 우승경쟁을 치른 나머지 미드필더에 창의성을 불어넣을 수 있는 핵심선수인 티아고가 제컨디션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피로의 누적으로 인해 전반적인 선수들의 날카로움이나 정확성이, 아주 좋았을 때에 비하면 조금씩은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사실 이 부분이 어쩌면 핵심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아주 좋은 컨디션을 유지한 우리는 패스나 탈압박을 하는 것을 정교하게 실수없이 해낼 수 있었습니다. 반면, 리버풀은 묘하게 디테일이 아쉬웠죠. 경기 끝까지요.
2. 시작
레알은 90% 이상이 예상했던 그대로의 라인업을 들고 나왔습니다. 리버풀의 경우 마팁 대신 코나테가 나왔는데, 경기를 보다 보니 확실히 나올만 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전 아라우호에 막혔던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정말 좋은 피지컬을 지닌 선수더라고요.
리버풀은 우리를 압박했고, 우리는 물러섰습니다. 이건 어느 정도 플랜대로의 상황이었다 봅니다.
첫째로 리버풀과 에너지레벨로 치고받기에는 분명 우리의 중원이 일정부분 부족하죠. 챔스 결승 마당에 와서, 여태 잘 하지도 않았던 카마빙가와 발베르데로 중원 구성해서 맞불 놓고 경기 치르는 건 자살행위라 보고요.
둘째로 리버풀이 상대를 뒤흔드는 방법은 맨시티처럼 아주 잘 짜여진 움직임과 공간의 지배를 통한 것이 아니라, 빠른 역습과 상대 뒷공간을 노리는 움직임을 이용하는 것이기에 뒷공간을 내주지 않는 수비를 하면 답을 잘 찾는 스타일이(적어도 맨시티나 첼시보다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정통9번이 없다는 약점도 있고요.
그래서 안첼로티는-본인이 나중에 밝힌대로-전반에는 페널티 에어리어에 선수 숫자를 많이 배치하며 공간을 없앰으로서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보기 싫어하는 크로스의 무지성 튀어나가기 압박과 같은, 잘 하지도 못하는 중구난방식의 압박은 거의 없었습니다. 밀리탕과 알라바는 마냥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한명씩 번갈아가며 튀어나와 상대방의 공격을 끊고 돌아가는 움직임을 보여주더라고요. 다시 보면 정말 예술적입니다.
따라서 플랜대로-어느정도는-흘러간 전반이었습니다. 다만 이레귤러의 상황은 마네의 뛰어난 개인기량에 의한 슛과 살라의 프리헤딩(비록 쿠르투아 정면이었지만) 정도 였다고 봅니다. 기타 상대의 슈팅은 뭐 위협적이었다 보기 어려웠고요.
다만 생각보다도 역습을 많이 못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페널티 에어리어에 선수들을 배치하고 그 앞쪽에 미드필더들을 구성하다 보니, 역습시 많아야 비벤발 3명으로 모든 걸 끝내야 하는 상황이 많았습니다. 전반부터 코스트 투 코스트 식으로 뛰어다니기엔 카는 너무 뒤에 있었고, 크모는 체력안배가 필요했죠(실제로 모드리치는 후반 30분 경엔 거의 방전됩니다).
3. 전반의 전개
아무튼 리버풀이 전반적으로 공격의 주도권을 잡은 채로 경기는 흘러갑니다. 코나테가 비니시우스를 막아섰기에 아놀드는 비교적 자유롭게 공격에 임할 수 있었고, 그쪽에서 리버풀의 공격대부분이 파생됩니다. 살라 역시 이전 경기들보다 좋은 컨디션을 자랑했고요.
반면, 리버풀의 왼쪽은 죽어버립니다. 일단 디아즈가 1:1에서 카르바할을 전혀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발베르데의 헬프도 있었지만, 카르바할이 상당히 좋은 컨디션이었기 때문이었고... 전 카르바할이 음바페를 상대하고 왔다는 게 컸다 보는데, 음바페급 상대를 하다가 루이스 디아즈라면...솔직히 거스름돈이 남는 장사긴 해요.
게다가 발베르데는 한두차례 부딪혀보고, 본인이 로버트슨을 공략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이는 레알 선수들이 모두 의식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무슨 소리냐면, 쿠르투아의 롱킥 대부분은 보통 비니시우스쪽을 향합니다. 그런데 전반 중반에 보면 벤제마가 쿠르투아에게 롱킥을 발베르데 쪽으로 때리라고 지시하더라고요. 이는 코나테에 막혀서 힘겨워하는 비니시우스 보다는 발베르데 쪽이 좀 더 수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거라 생각합니다.
로버트슨은 발베르데 때문인지, 전술적 지시 때문인지는 몰라도 평소보다는 굉장히 제한된 , 사이드쪽에 치우친 공격을 하게 됩니다. 아마 제 컨디션이 아닌 티아고가 수비적으로는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부분 역시, 로버트슨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전반 20여분 이후는 리버풀도 초반마냥 올려서 공격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공격적 주도권은 리버풀이 쥐고 간헐적으로 공격을 시도하던 중, 벤제마가 상대를 섬뜩하게 만드는 옵사골을 성공시킵니다. 경기장의 분위기가 이때 바뀝니다.
4. 안첼로티
안첼로티의 가장 큰 자산은 바로 이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한순간에 경기장 분위기가 바뀐 가운데 내리 3골을 먹고 결국 패배해봤다는 겁니다. 즉, 안첼로티는 이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우리 경험치 많은 베테랑들도요.
후반은 시작부터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모드리치와 크로스가 특유의 무지성 압박?을 하기 시작하고, 선수들도 리버풀의 압박을 헤쳐나오는데 비교적 여유를 갖기 시작했죠. 즉, 바뀐 흐름을 깨닫고 공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거고, 바로 이 시점에 발베르데의 슛터링에 이은 비니시우스의 골이 터집니다.
여담이지만, 여기서도 벤제마의 센스가 돋보입니다. 본인이 옵사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았던 벤제마는 어거지로 발을 뻗지 않고, 그대로 흘려둡니다. 만약 관여했다면 당연 옵사이드였겠지요.
5. 쿠르투아
선제골을 넣는 순간, 아 우리가 정규시간 동안 지지는 않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상대는 생각보다 조급해서 디테일이 아쉬웠고, 우리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다만, 그걸 넘어서 우리가 이길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쿠르투아가 해낸 영웅적 선방-특히 살라의 것을 막아낸-때문이었죠.
6. 세트피스 수비
가장 걱정했던 것은 코너킥 수비였는데, 정말 역대급이라 할 정도로 잘 막았습니다. 제가 잘못본게 아니라면, 대인마크라기보다는 지역 수비로 공간을 배분하여 우리가 막는게 아니라 우리가 공격한다는 식으로 헤딩을 따내고 공을 걷어내더라고요. 코치진의 준비에 정말 박수를 보내는 바입니다.
7. 마무리
교체를 빠르게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흐름과 긴장감을 깰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위기에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차분하게 활동량 많은 선수를 투입하고(카마빙가), 미드필더 숫자를 늘리고(세바요스), 마지막 역습 및 시간끌기 자원(호드리구)을 투입했습니다. 안첼로티는 끝까지 냉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상대에게 특별한 비장의 카드 같은 건 없었고, 결국 우리는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
제가 레알 팬을 한 뒤로, 가장 극적이었던 시즌이 끝났습니다. 물론 가장 극적인 순간을 단 한순간만 꼽으라면 라데시마겠지만, 16강, 8강, 4강에서 역사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마침내 우승트로피를 거머쥔 이시즌을 가장 극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매번 참 어처구니없는? 시간대에 일어나 생중계로 경기를 시청하며 이야기를 나눈 모든 분들, 모든 레알팬들, 운영진들...모두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정모 불참 넘 아쉽네요 ㅠㅠ). 잊지 못할 한해였고, 다음 시즌에도 행복한 일들이 많길 기대합니다.
댓글 18
-
라모라모라모 2022.06.01이런 극적인 순간 하나하나가 모여 경기를 보는 팬들로 하여금 레알 마드리드를 사랑하게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합니다 ㅎㅎ 할라 마드리드!
-
subdirectory_arrow_right 마요 2022.06.01@라모라모라모 ㅜㅜ 감격의 한해였습니다ㅜㅜ
-
마르코 로이스 2022.06.01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어본다라는 말이 있듯이 개인적으로는 그냥 처음부터 클롭이 안첼로티 손바닥 안에 놀아난게 아니었나 싶네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결국 증명해내니...
-
subdirectory_arrow_right 마요 2022.06.02@마르코 로이스 뭐 음해?하는것 보다는 좋은 감독이죠ㅋ 다음시즌엔 올시즌보다 좋기를
-
블랑코즈 2022.06.01골을 어시스트한 발베르데에게 공이 가기까지 전개는 말 그대로 예술이었죠
-
subdirectory_arrow_right 마요 2022.06.02@블랑코즈 일단 선수들 체급?이 워낙 높죠ㅎㅎ
-
노아피 2022.06.01포체티노, 투헬, 펩, 클롭의 팀들을 모두 격파한 시즌이죠. 놀랍다는 말 밖엔 할수가없는 시즌이었습니다.
-
subdirectory_arrow_right 마요 2022.06.02@노아피 운도 따랐지만 그 운을 잡아내는게 실력아닌가 싶습니다.
-
아르한 2022.06.01경기를 라이브로 봤는데도 우리가 우승했다는게 믿기지 않더라고요
자고 일어나서 레알 유튜브에 선수들 빅이어 들어올리는게 올라왔는데 그때야 실감이 났습니다 ㅋㅋ -
subdirectory_arrow_right 마요 2022.06.02@아르한 이 시즌을 두고두고 잊지 못할것같아요.
-
디온ㅇㅅㅇ 2022.06.02잘 봤습니다.
말씀하신 내용들이 모두 참으로 전술적인 판단과 실행들인데,
안첼로티에게 전술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좀 줄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
subdirectory_arrow_right 마요 2022.06.02@디온ㅇㅅㅇ 적어도 레알팬이라면 너무 무전술 이런 얘기안했음해요ㅋ
-
라그 2022.06.02경기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글로 옮기는 것에 불과한(?), 아주 좋은 글이군요.ㅋㅋ 핵심만 이렇게 틱틱 집어주시니 전 리뷰 안 쓰고 이걸로 대체하겠습니다.
-
subdirectory_arrow_right 마요 2022.06.02@라그 시즌리뷰 부탁드립니다
-
아들찬스안첼로티 2022.06.02시즌 마지막 경기인데 리버풀이 체력이나 부상 문제로 생각보다 적극성이 떨어진 게 확실히 큰 부분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자신들의 자랑인 카운터프레스가 후반에는 확 떨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렇고.
-
subdirectory_arrow_right 마요 2022.06.02@아들찬스안첼로티 모든 플레이가 묘하게 정확성이 떨어지더라고요@@
-
Inaki 2022.06.04결국 이걸 혼자보신 패배자이십니다…
-
subdirectory_arrow_right 마요 2022.06.04@Inaki 노쇼 루져입니다 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