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 안첼로티,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
1. 삶은 아름답다
오늘 경기를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시청했습니다. 90분 내내 한숨이 가득했는데, 단 2분만에 뒤집어지는 경기를 보고 난 직후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고작 축구 한 경기를 보았는데 말이죠.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감동적인 경기를 시청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새로운 감정들을 느껴보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삶은 늘 살아갈 만 한 것이고, 자녀를 낳는 것 역시 새로운 인격체로 하여금 살아가면서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이러한 행복을 느끼게 해주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 2018년, 키예프
오늘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2021/22 챔피언스 리그의 결승전 상대는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최고의 팀이자, 세계 최고의 팀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팀 리버풀입니다. 오늘 경기의 감동이 가시고, 리버풀과의 경기를 복기한다는 생각으로 지난 2018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하이라이트를 틀어 보았습니다. 킥오프 이후 놀랐던 점은 제가 방금 봤던 헐떡이던 크로스, 모드리치, 카세미루가 헐떡이지 않고 경기장에서 질주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방금까지 벤치에서 열심히 응원을 해주던 마르셀루가 경기장 이곳저곳을 혼자서 휘젓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4년이라는 세월이 이렇게 크다니...
감독은 지단, 골키퍼는 나바스, 주장은 라모스, 그의 곁에 바란, 최전방에는 지금과 같은 기대를 갖게 하지 않는 소위 10번형 공격수라 불리던 벤제마와, 반대로 늘 득점을 기대하게 만드는 호날두가 있었습니다. 절대로 뚫리지 않을 것 같은 수비진을 보며, 새삼 라모스와 바란 듀오가 그리워졌습니다. 라모스와 살라의 충돌로 살라가 부상을 입어 눈물을 흘리며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보며, 이번 리버풀전이 누군가에겐 이를 갈며 복수할 기회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2018년, 벤제마가 4년 뒤 챔피언스리그 한 시즌 15득점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면 아마 미친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당시 키예프에서 골키퍼 전방 압박에 이은 벤제마의 선취골을 보았던 수천만, 수억명의 사람들 중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 해봅니다.
경기를 다시 보면 제 기억보다 지단의 레알에서 '이스코'의 역할이 컸던거 같습니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도 이스코에게 상당한 기회가 많이 있었고, 골대를 맞춘다던지 한끝차이로 공이 빗나가는 장면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지단이 베일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고, 베일이 교체되어 들어갑니다. 그 교체를 바라보는 관중들의 표정에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런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베일은 결승전에서 환상적인 오버헤드킥과 중거리 슛으로 리버풀을 침몰시킵니다. 그 누가 이 선수가 머지 않은 미래에 축구를 하지 않는 골프맨이 될줄 알았을까요? 이때만 해도, 페레즈 회장님은 베일의 장기 재계약을 잘했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렇게 베일의 활약으로 2014년부터 2018년까지 레알 마드리드는 5년간 4번 유럽의 왕이 되었습니다.

3. 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리스본의 기적
지단의 그림같은 발리 슛 이후 한번도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던 레알 마드리드에게 우승청부사 무리뉴도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을 가져다주지 못했고, 수뇌부의 선택은 안첼로티 였습니다. 그렇게 안첼로티 감독은 2013년 무리뉴 감독을 대신해 레알 마드리드에 등장합니다. 그리곤 만화 이야기처럼 레알 마드리드에 정말 오랜만의 우승컵을 선물합니다.
'리스본의 기적'이라 불리는 레알 마드리드의 2014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은 오늘 경기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전반 36분 선취득점을 허용했고, 패배의 그림자가 짙어질 무렵 후반 90분에서 추가시간 3분이 지난 그 시점 세르히오 라모스의 천금같은 동점골이 터집니다. 이후 모두가 알고있듯 베일, 마르셀루, 호날두의 득점으로 레알 마드리드가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때부터 안첼로티는 레알 마드리드의 DNA를 일깨워 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오늘 맨체스터 시티와의 4강 2차전에서 보여준 레알 마드리드의 '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는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이자 유니폼에 담긴 후아니토 정신이 가지고 있는 DNA 말입니다.

4. 이스탄불의 악몽
2004/05 시즌, 안첼로티 감독의 배는 지금보다 덜 나와있습니다. 얼굴에도 주름이 좀 없어 보입니다. 약 18년 전이니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습니다. 안첼로티는 세계 최고 구단중 하나였던 AC밀란의 감독입니다. 선발 11명의 선수가 모두 지구 최강의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는 AC밀란은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훨씬 약세로 평가받는 리버풀을 만나 엄청난 전반전을 치룹니다. 전반 1분 말디니의 선취골, 전반 39분 크레스포의 득점, 전반 44분 크레스포의 쐐기골까지 들어가며 이 경기를 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모든 것은 베니테즈 감독의 열정적인 라커룸 연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후반 9분 제라드의 만회골, 11분 스미체르의 추가골, 25분 사비 알론소의 동점을 만드는 득점이 이어집니다. 이때만 해도 안첼로티 감독은 사비 알론소와 자신이 레알 마드리드에서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될줄 알았을까요?
이어진 승부차기에서 리버풀이 이스탄불의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그 기적은 안첼로티 감독에게는 이스탄불의 악몽입니다.

5. 리버풀, 그리고 안첼로티
이스탄불의 악몽이 있었던 2005년 5월 25일을 기점으로 안첼로티 감독의 전술이나 용병술, 심지어 인터뷰에서의 농담까지 모든 것이 바뀝니다. 안첼로티는 아무리 큰 점수로 이기고 있어도 주전을 빼지 않는 감독이 되었고, 선수들의 체력 안배를 위한 로테이션을 극도로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에서 이러한 지적을 들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아픈 과거를 이야기 합니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전반전 3-0으로 이기고 있다가 패배한 사람이 있을까요?"
17년이 흐른 오늘까지 안첼로티에게 이스탄불의 악몽은 상처인거 같습니다. 올해 챔피언스 리그 인터뷰에서도 위와 같은 농담이 이어졌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기적처럼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순간이 왔습니다. 레알 마드리드가 2022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안첼로티는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안첼로티 감독을 따르는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은 과연 4년 전 살라를 잃고 패배했던 기억을 가진채로 복수심에 불타는 리버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요?
이것이 오는 5월 29일 새벽 4시 프랑스에서 펼쳐질 리버풀과의 한판 대결이 더욱더 기다려지는 이유들입니다.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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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로이스 2022.05.05이런 좋은 글에 댓글이 없다니 추천 누르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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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크카 2022.05.05좋은 글입니다! 칼럼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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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유스출신 2022.05.05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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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신왈왈이 2022.05.05쩌는 필력 잘봤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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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망명자 2022.05.05굳이 로그인해서 댓글 남기게 하는 필력이네요 ㅋㅋ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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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gend_zizou 2022.05.05분석도 분석이지만 필력이... 마치 하나의 칼럼을 읽은 기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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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나 2022.05.06리버풀과의 결승전에 얽힌 스토리들을 잘 풀어놓으셨네요. 축구 잡지 같은 데 실려도 될듯한 느낌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벌써부터 결승전이 더 기대되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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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coAlarcón 2022.05.06제발 리버풀의 쿼트러플을 제지할 수 있길... 리그는 시티가 컵대회는 첼시가 챔스는 레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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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젖 2022.05.08*리버풀도 정말이지 우리에게 이를 갈고 있겠지요. 솔직히 그 \"카리우스\"는..뭐..상대팀이라 땡큐였습니다마는 팬 입장이었다면...ㅋㅋㅋㅋ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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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gio canal 2022.05.08기대됩니다 정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