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호 우승 과정과 선수들 이야기
라울의 유스 챔스 우승과정이랑 짧은 생각 몇 가지 정리해서 올려봐요. 막 대단한 거 해냈다고 좋아하고 오두방정 떨었는데 우승하기까지 이런 배경도 있었구나 정도만 봐주세요.
#1 저평가 세대
아무도 우승할 거란 기대를 하지 않은 세대입니다. 세대 대표급 에이스도 없고 전력 자체가 이전 4강 선배들보다 낫다고 보기 힘든 수준이었죠. 직전 시즌 성적이 8강인데, 그 조기탈락 세대가 여전히 상당수 포진해있는 팀이니 당연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올해엔 특출난 에이스가 없는게 컸는데요. 세간의 평가도 그랬고 기록으로 봐도 팀 득점은 조별리그 기준 32개팀 중 4번째(16골, 최다 잘츠부르크 19골), 토너먼트 기준 결승까지 11골(준우승 벤피카 12골)로 꽤 준수한데도 개인득점 탑10에 우리 선수가 한 명도 없습니다. 팀 내부로 봐도 최다득점자가 4골x2(라타사, 미겔)이고 그 아래로 3골x1(파블로), 2골x4 등 폭넓게 분포돼있고요. 우승팀이 득점왕은 고사하고 열손가락에 드는 선수 하나 안 가졌다는게 흔하진 않잖아요.
조별리그(포야토스 체제)와 토너먼트(라울 체제)가 아예 다른 팀이라 단언할 순 없지만 적어도 토너먼트로 한정해서 이번 우승은 팀 단위 시너지가 만든 결과물입니다. 기계적인 라인 간격유지, 압박과 수비 커버, 공수 전환 속도조절 등의 조직적인 디테일과 짜임새가 흔들림 없이 운영됐고, 주도권이 넘어오고 상대를 틀어쥐게 됐을 때 정타를 꽂아 챙기는 실리까지. 내실 탄탄하고 뒷심있는 팀으로서 단판 토너먼트에 최적화 된 면모를 상대보다 한차원 위로 보여줬습니다. 그 절정이 12분 만에 퇴장으로 수적열세에 몰리고도 나머지 80분 동안 압도해 잡아먹은 16강 유벤투스전이었고요.
여기에 더해 선수 이탈이 일어나도 경기력에 편차가 없었습니다. 선수들이 전부 부여받은 역할 안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시스템으로서 기능합니다. 16강 유베전에 조르디가 퇴장당했을 땐 아리바스와 블랑코가 역할을 분담하며 2인분 이상을 해냈고 후보인 신테스도 4강가기까지 충분한 역할을 해줬으며 결승에 우려했던 라타사 결장으로 대신 나온 파블로가 귀중한 선제골을 넣어준 건 화룡점정이었구요. 선수단 동기부여와 응집력이 좋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2 감독
라울은 4-1-4-1, 4-5-1에 좀 더 가까운 포진으로 대회 내내 운영했습니다. 그림보면 아시겠지만 포백부터 중원 척추라인까지는 변화가 없고 8강(조르디→마빈)이랑 결승(라타사→파블로)에서 카드트러블로 바뀐 자리 빼고는 거의 바꾼 게 없죠. 팀내 입지랑 실력으로 미루어 4강전 라인업이 베스트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위치상으론 사이드지만 8번 박스 투 박스 성향인 도토르를 좌측에 두고 기동력 있고 공격적인 마빈, 아리바스를 반대편에 몰아두는 비대칭 구성이 핵심입니다.
도토르, 블랑코, 모란테 모두 볼을 안정적으로 잡아놓고 앞뒤로 보낼 수 있는 선수들이라 이들을 중심으로 빠른 측면전환이 이루어지면 일대일에 자신있는 아리바스가 풀백과 협업으로 압박을 풀어냅니다. 버티기와 높이가 되는 라타사가 수비를 잡아두고, 미드필더들이 침투해 벌린 공간을 마빈이 빠른 발로 공략하는 속공 기반으로 실리를 알차게 챙겼습니다. 특히 측면에서 아리바스 개인능력으로 전개 후 순간적으로 박스 숫자를 늘려 시도하는 유효타가 상당히 먹혔는데 전진 미들인 도토르, 모란테, 아리바스, 마빈 전부 이번 토너먼트에서 득점한 것이 그 완성도를 시사한다고 보고, 8강과 4강에서 같은 코너킥 패턴으로 득점한 세트피스 부분전술 또한 우수했습니다. 라울은 카스티야에서도 8번 성향의 피달고를 좌측에 놓고 비슷한 운영을 줄곧했는데 어쩌면 꾸준한 연구 성과를 이번에 낸 것 같기도 하네요.
꼭 하나 짚고 싶었던 게 골키퍼 로테이션입니다. 푸이디아스-루이스로 16강부터 퐁당퐁당 로테이션인데 토너먼트에서 부상같은 변수가 아닌 이상 보기 힘든 특이한 선택인데요. 이 둘은 카데테 B(U-15)부터 같이 올라왔는데 평가는 루이스가 더 높은 편입니다. 스페인 연령별 대표도 뽑히고 올해 1군 경기 소집도 됐었고(38R 레가네스전) 결정적으로 팀내 주전도 루이스입니다. 챔스도 토너먼트 전까지 조별리그에서 루이스가 전 경기 선발이었고 푸이디아스는 루이스가 부상 당한 경기에서 교체로 10분 뛴 게 전부였죠. 아니나 다를까 푸이디아스는 4강전에 공중볼 실책, 펀칭미스를 수차례 저지르면서 위기를 만들었고 루이스는 결승전 동점 위기에서의 페널티킥 선방으로 평가를 증명했구요. 범인의 머리론 이해할 수 없지만 라울은 둘의 실력이 비슷하다고 봤거나 아니면 동기부여 의도, 둘 중 하나 아닐까 정도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3 선수
유스 챔스는 19세 이하 대회인데 20세 선수들을 와일드카드로 넣는 제도가 있어요. 서두에 팀을 이끄는 에이스가 없다고 했는데 그나마 기댈 구석이 카스티야 출신 페드로, 바에사였는데요. 이들은 조별리그에서도 상당히 활약하며 짬바를 보여줬는데 페드로는 장기부상, 바에사는 16강 며칠 앞두고 셀타로 이적해버리면서 그마저도 없는 전력누수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이게 기가 막힌 전화위복이 되었어요. 후보였던 아리바스, 라타사의 등용 기회가 되어 침샘이 마르도록 물고빨아도 부족한 최고의 활약을 해줬습니다.
주전 11명은 물론이고 후보로 쓰인 선수들까지 전부 역할을 충실히 해준 이번 우승이지만 그 중에서도 으뜸수훈은 단연 아리바스입니다. 위치와 역할상 바에사랑 정확히 겹치는 선수라 조별리그에서는 교체 4경기, 선발 2경기에 그쳤는데 바에사 이적으로 본격적인 기회를 잡자마자 자기주도로 팀의 퀄리티를 바꾸는 퍼포먼스를 보여줬죠. 체구는 작지만 정교한 볼컨트롤과 빠르고 유려한 방향전환으로 측면이든 중앙이든 상대를 거뜬히 제압할 수 있고 위력적인 왼발 킥도 가졌으며 동료과 잘게 썰어가는 협업 등 부분전술 수행 역시 탁월. 볼운반, 전개, 탈압박, 마무리 패스 등 모든 플레이메이킹에 16강전 동점골/8강전 PK 유도 및 2도움/결승전 선제골 도움 및 자책골 유도 등 순도 높은 공격포인트까지 그야말로 이번 라울호의 알파와 오메가였죠. 팀에 다양한 공격옵션과 패턴을 우수한 기술을 바탕으로 가져다줄 수 있는 자원으로 향후가 무척 기대됩니다.
라타사는 토너먼트 2골, 대회 총합 7경기 4골이라는 준수한 기록 이외에도 꽤나 좋은 플레이를 대회 내내 해줬습니다. 스페인 내 어린 유소년 공격수 중에는 타고난 체구가 좋아도 훈련 습관탓인지 신체적 이점은 활용도 못하면서 안 어울리는 드리블이나 뒷공간 위주 플레이로만 일관하고, 그러면서도 몸은 커져서 움직임은 둔해지고 결국 이도저도 아닌 선수로 머무는 사례를 참 많이 봤는데요. 라타사는 배후 움직임으로 수비 괴롭히는 건 물론이고 측면으로 빠져서의 협업 수행, 또 밀집지역에서 버티고 잡아주는 포스트 플레이와 높이를 활용한 타깃 플레이까지 본인이 가진 베이스로부터 이해와 학습이 잘된 9번의 면모였습니다. 그리고 키가 크고요.
마빈은 상대가 진영을 갖춰놔도 측면을 단독으로 부수고 들어가는게 될 정도로 좋은 신체능력을 가진 윙어입니다. 문제는 그 속도와 힘의 제어와 약간의 세밀함인데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계속 앞쪽라인 선수들 위주로 이야기했는데 수비진은 실점 기록과 별개로 전원 나무랄 데 없는 좋은 플레이였습니다. 하나를 꼽자면 유스 챔스만 벌써 3년차인 베테랑 추스트인데요. 집중력 높은 수비를 기본으로, 압박에도 볼을 전방위로 잘 제어했고 어려서부터 강점으로 꼽혔던 앞을 보는 시야와 적재적소에 정확한 킥 빌드업까지 주장으로서 끝까지 팀을 잘 지탱해준 수훈입니다. 이제 나이가 차서 유스 챔스는 더 이상 뛸 수 없으니 높은 무대에서 날아오르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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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 챔스는 출범 이후 지금까지 피지컬 굇수들이 즐비한 첼시나 포르투갈 팀들, 또는 바르셀로나 등이 강세인 대회인데요. 우리는 영입이 아닌 로컬 선수 위주로 충분히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인데도 4강 문턱에서 번번이 그르치고 뒷심 부족해 떨어져 참 많이 답답했는데 올해처럼 좋은 과정을 통해 첫 우승을 해냈다는 게 얼마나 시사하는 의미가 큰 지 다들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비교적 주목도가 있는 대외무대에서 낸 유의미한 결과물인 만큼 이번 계기로 ‘강한’ 우리 유스에 많은 애정과 관심 가져주시면 좋겠습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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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이 2020.08.30정성글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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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jamin Ryu 2020.08.30저도 우승은 예상 못 했습니다. 잘츠부르크, 아약스, 벤피카에 걸출한 선수들이 많아서...여기에 차, 포 뗀 인테르 상대로 고전하기에 쉽지 않겠다고 여겼는데 우승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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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오 2020.08.30구티시절에 4강 간걸 마지막으로 유챔은 안봤는데 라울형님이 이뤄주시니 뿌듯하군요. 그리고 추스트맘으로써 잘 성장하고 있다니 감격스럽네요. 꼭 1군에서도 볼 수 있는 인재로 크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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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젖 2020.08.30한국에서 이만큼의 퀄리티를 가진 스페인 유소년 축구 관련 글을 다른 어디서 볼 수 있을런지요.
잘 읽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드려요. -
디온ㅇㅅㅇ 2020.08.31평소 찾아볼 수 없는 귀한 정보를 시간 내어 글로 남겨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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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데고르 2020.08.31잘봤습니다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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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태 2020.08.31글 잘 봤습니다.
사실 챙겨본 경기가 결승밖에 없어서 뭐라 말하기가 조심스럽긴 한데 제가 인상적으로 봤던 건 팀으로서의 완성도가 또래 팀들에 비해 상당히 높다는 점이었어요. 라울이 짜온 비대칭 시스템 자체도 꽤 흥미로웠지만 체격과 기술이 좋은 상대에 대응하여 마빈을 수비 시 윙백처럼 내려 5백을 조성하고 아리바스의 테크닉과 모란테의 킥을 기반으로 빠르고 효율적인 전환을 다수 만들어내는 장면들이 꽤 인상깊었습니다. 마빈 가동 범위가 상당히 길었는데 그럼에도 앞선에서 제법 위협적인 장면들을 상당수 만들어낸 거 보면 피지컬에서의 우월함은 인정해줄 만 할 것 같고요.
딱히 주목할 만한 세대가 아니란 얘길 예전에 들은 적이 있어서 그리 큰 기대 없이 봤는데 아주 견실하고 탄탄하게 활약하는 선수들 보면서 괜시리 미안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이번 대회가 제게 그러했듯 다른 분들에게도 유스 카테고리에 조금 더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래 봅니다. 이런 글 꾸준하게 쓰시면 다른 분들 관심 끌기 더 좋을테니 달마다 쓰세요. ㅊㅊ -
D.레오 2020.08.31잘 봤습니다. 일단 라울이 전술적인 면에 있어서 감독적인 모습을 보여줬다는거에
대해서 참 좋네요.. 후에 지단에게 무슨일이 있어 감독을 못한다고 할때
구티나 라울등이 후계자로 감독으로 와서도 잘 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뭐 애초에 구단유스의 스타출신이라 외부에서 선수들이 와도 함부로 못할건
확실할테고.. -
라그 2020.08.31선수 개인의 역량으로 우격다짐 우승한게 아니라 팀 단위에서 완성된 조직력을 선보였다는건 포야토스가 쌓아올린 부분도 있겠지만 라울이 단기간에 팀을 치밀하게 운영할 능력이 있다는거라 앞으로 라울의 행보가 기대되네요. 지단도 그렇지만, 라리가나 분데스리가의 많은 팀이나 선수가 기본기가 탄탄한 팀이 되는건 지도자 육성을 잘해서 그런 부분도 크다고 생각하는데 제대로 공부한 젊은 감독들이 요즘 참 많이 대두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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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directory_arrow_right 라그 2020.08.31@라그 참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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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 2020.08.31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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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은새 2020.08.31일단 추천!
엄청난 재능이 있다고 평가받지는 못한 세대인 거 같은데, 라울이 팀을 잘 만들어 우승을 한 거 보니 감독으로서 기대도 되네요. -
거기서현 2020.08.31다른것보다 라울이 원팀으로 만들어낸
우승이라는게 값어치 있네요
나중에 지단 후임 걱정은 안해도 될듯 -
라파 나달 2020.08.31라재앙에서 갓울까지....
추스트는 1군에서 꼭보고싶네요. -
마요 2020.08.31어린친구들에 대한 애정이 참 많이 묻어나는 글이네요. 잘 봤습니다.
참 좋은 선수들이 많이 있지만, 프로리그 레벨에서 뛰는 순간 선수들이 한계에 봉착하는데 이 같은 상황이 자주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다음 시즌에는 꼭 승격했으면 합니다.
참 레알의 유스라는 건...어려운 일이네요. ㅎㅎ 이 모든 걸 이겨내서 레귤러로 완벽하게 자리하는 선수가 또 하나 나왔으면 하네요. -
디마리아 2020.09.01좋은 글 감사합니다. 확실히 이번 우승은 팬들에게 유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도움이 될 거 같네요. 당장 저도 덕분에 어린 친구들 영상 보게 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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뵨쟈마 2020.09.02이 글을 방금 전에서야 정독했는데, 그야말로 최고급 레스토랑의 풀코스 요리를 제대로 즐긴 기분이네요. 국내에만 묵혀두기엔 너무 아까운 퀄리티인데, 진지하게 해외진출을 고민해보시길 권장드립니다.
여긴 파이 자체가 작고 돈도 안되는 구조지만 유럽은 언어와 실력이 문제지 시장 자체는 확실하고, 구단 공홈에 직접 두드려보는 것도 생각해봄직하구요. 절정에 오른 듯한 필력에 감탄이 절로 나오는 글입니다.
라울호의 유스 챔스 우승은 그야말로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죠. 대내외적으로도 그렇고, 그리고 토티님께도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작은 보상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
기록을 살펴보며 궁금했던 것들은 본문을 통해 거의 해결되었고, 한가지 와일드카드로 뽑힌 마빈이 16강부터 결승까지 한번도 풀타임이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위에 온태님 댓글 덕분에 충분히 설명이 된 거 같습니다. 재밌게 잘 읽고 가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