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ter_list
오사수나일요일 2시

카르바할 이야기

온태 2020.01.22 00:37 조회 3,729 추천 33
개인적으로 올시즌 이 팀에서 가장 저평가받는 선수는 카르바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팬들에게 나쁜 평가를 받는 선수는 아니지만 카르바할이 현재 이 팀에서 가지는 전술적 입지와 수행능력을 고려할 때 충분히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올시즌 경기를 꾸준히 챙겨보신 분들은 느끼셨겠지만 심장병 이후 하락세를 타던 카르바할의 피지컬 핏은 올시즌을 기점으로 다시금 상승세를 타고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한창 짱짱하던, 운동능력만으로 팬들에게 역대급 풀백들을 소환해내던 그 시절엔 약간 못 미치지만 카르바할이 아니면 하기 힘든 플레이-예컨대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튀어나와 상대를 압박하거나 볼을 잘라내고 순식간에 자기 자리로 복귀한다던가, 자기보다 훨씬 큰 상대와의 경합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여유있게 볼을 빼낸다던가 하는 것들-의 빈도가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직접적인 증거라고 보긴 조금 애매하지만 태클 성공률과 돌파당한 횟수가 커리어 최고치를 찍고 있다는 것도 이를 방증합니다(각각 79.5%, 90분당 0.5회).

그럼에도 카르바할이 미적지근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예전만큼 압도적인 종적 영향력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지컬 회복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클 빈도, 인터셉트 횟수, 드리블 빈도 등의 스탯은 어린 시절에 비해 뚜렷하게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카르바할 하면 떠오르는 투사의 이미지와 달리 플레이 적극성이 내려왔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팀이 보다 정상적인 좌우 밸런스를 갖춘 시스템을 구성하면서 더이상 카르바할에게 과도한 커버 범위를 요구하지 않게 되었으며, 이 시스템에서 카르바할이 새로운 역할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하프스페이스의 대두로 인한, 소위 메짤라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중앙 미드필더의 측면 움직임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메타 중 하나가 풀백의 플메화와 중앙 개입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미들이 돌아나간 자리를 풀백이 메우는 셈인 겁니다. 이러한 메타에서 두 포지션은 비슷한 활동영역을 공유하기 때문에 포지션 호환이 꽤 쉬운 편입니다. 당장 생각나는 선수들만 해도 람, 키미히, 아놀드, 진첸코, 파비뉴, 세르지 정도가 떠오르고, 포지션 전환까지 가진 않더라도 이러한 롤에 적응한 풀백들도 제법 보이는 편입니다. 이런 메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활용하는 대표적인 팀이 맨시티와 리버풀이고, 마르바할이 있는 이 팀도 그 사례 중 하나로 언급할 만 합니다. 비록 지단이 이러한 메타를 선도하는 감독은 아니었지만, 있는 자원을 활용하지 못하는 바보는 아니었고 이러한 풀백 활용은 쓰리핏 내내 팀의 핵심 동력으로 작동했습니다. 그리고, 올시즌 지단은 카르바할을 더욱 노골적으로 메타에 맞게끔 활용하고 있습니다.

선수가 팀에서 갖는 온볼 영향력을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지표는 패스 횟수입니다. 팀의 볼 전개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할수록 볼을 많이 잡게 되며, 볼을 많이 잡는 선수일수록 패스 횟수가 많은 게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특히 비슷한 포지션과 비슷한 높이의 활동 영역을 가진 선수들 간의 비교에서 더욱 도드라집니다. 이 패스 횟수에서 카르바할은 90분당 66.9회로 77회의 크로스에 이어 팀내 2위에 올라 있습니다. 이는 카르바할의 통산 시즌별 기록 중 가장 높으며, 올시즌 리가 풀백들 중에서도 3위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앞 두명은 바르셀로나 듀오). 앞서 언급한 맨시티와 리버풀의 풀백들과 비교하더라도 큰 차이가 없으며, 저 팀들의 패스 횟수가 이 팀에 비해 적게는 50회에서 많게는 120개 가량 많은 팀임을 고려하면 올시즌 카르바할보다 팀내 패스 비중이 높은 풀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팀의 xG에 기여한 정도를 측정하는 스탯인 xGChain에서도 카르바할의 기록은 돋보입니다. xGChain은 슈팅으로 이어진 빌드업 과정에 참여할 때마다 누적되는데, 높을수록 팀의 득점 확률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xGChain에서 카르바할은 12.60을 기록하여 벤제마에 이어 팀내 2위에 올라 있으며, 90분당 xGChain에선 0.74로 공동 7위, 수비수 한정으론 마르셀루와 함께 공동 1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0.74의 90분당 xGChain 수치는 지난 시즌 0.44의 2배에 약간 못미치는 수준이며, xGChain 지표에서 커리어 하이인 15/16의 0.80에 거의 근접한 값입니다. xG와 xA 상으로도 올시즌 카르바할은 커리어 하이를 달리고 있는데, 특히 xG의 약진이 눈에 띕니다. understat.com이 제공하는 14/15시즌부터 카르바할의 xG값은 단 한시즌도 1을 넘긴 적이 없는데, 시즌의 절반을 살짝 넘어가는 올시즌 현시점의 xG는 2.28입니다. 하프스페이스를 기반으로 중앙으로의 개입이 늘어나며 좋은 슈팅 찬스를 많이 잡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올시즌 카르바할은 온볼 플레이의 양과 질 모두에서 진일보한 모습으로 현 메타에 완벽히 부합하고 있습니다. 라이트 윙에 변변한 선수가 없어 매경기 답답함에도, 팀의 메인 플메면서 횡방향 기여가 탁월했던 모드리치를 종방향 기여가 돋보이는 발베르데가 대체했음에도 우측면 붕괴 없이 시스템을 굴릴 수 있었던 건 라이트의 터줏대감으로서, 보조 리더로서 크로스를 잘 보좌한 카르바할의 공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카르바할의 이러한 변화를 더욱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건 기량하락으로 어쩔 수 없이 변화를 시도한 게 아니라 피지컬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입니다. 어린 시절에 비해 줄었다지만 여전히 카르바할의 커버 범위는 여타 라이트백에 비할 바가 아니며, 카르바할의 나이는 아직 만 28세입니다. 변변한 라이트 윙과 횡방향 기여도가 좋은 외데고르의 합류, 발베르데의 발전 가능성 등을 고려하면 카르바할도 더욱 좋은 모습을 보여줄 여지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볼줄기를 말려죽이려는 강한 압박을 단신으로 헤쳐나오던 헤타페 전의 카르바할에게 상술한 동료들의 지원이 더해진다면 어떤 팀을 만나든 골문까지 능수능란하게 볼을 전달하는 카르바할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쉽게 그려볼 수 있을 테고, 그게 실제로 실현된다면 카르바할은 다시금 올타임 레벨의 선배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게 될 겁니다.
format_list_bulleted

댓글 32

arrow_upward 2003년생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 arrow_downward 음바페: 시즌이 끝나면 알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