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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는 왜 시민 구단인가?

Benjamin Ryu 2017.05.06 08:58 조회 2,450 추천 13

맨체스터 시티의 구단주인 셰이크 만수르는 2010년에 레알 마드리드의 인수를 위해 1조 원이 넘는 금액을 제시했지만, 플로렌티노 페레즈 회장은 레알 마드리드는 돈으로 살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처럼 오늘날 수많은 클럽이 외국인 자본가들에 의해 인수되지만,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같은 거대한 시민 구단은 재정적인 압박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번쯤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지 모른다. 레알 마드리드와 같은 거대한 클럽이 왜 시민 구단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1)레알 마드리드의 설립 배경

 

아틀레틱 빌바오가 바스크 지방의 영국 유학생들에 의해서 창설된 클럽이라면, 레알 마드리드는 1897년에 에스파냐의 수도인 마드리드의 학생들과 무료 교육 기관에서 일했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이하 옥스브리지) 대학생들의 주도로 설립된 클럽이다.

 

옥스브리지 대학생들은 에스파냐 학생들에게 축구를 알려줬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축구가 보편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드리드에서 축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이에 옥스브리지 대학생들은 에스파냐 학생들이 몬크로아(마드리드의 대학가)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축구를 할 수 있는 아마추어 클럽을 창설하는 게 목표였다. 아마추어 클럽은 옥스브리지와 에스파냐 학생들을 중심으로 기틀을 잡아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는 에스파냐의 공학과 대학생인 훌리안 팔라시오스였다.

 

당시 만 20살의 훌리안 팔라시오스는 조국 에스파냐가 전쟁(에스파냐-미국 전쟁)에서 패배해 쿠바와 필리핀을 비롯한 식민지들을 상실한 데 이어 극심한 경제 위기까지 겹치자 축구가 실의에 빠진 에스파냐 국민들을 위로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에 훌리안 팔라시오스를 비롯해 뜻이 맞는 학생들과 그의 지인들은 사비를 모아 아마추어 클럽을 구성했다. 하지만 1900년에 클럽을 경영하는 부분에서 견해 차이를 보여 뉴 풋볼 데 마드리드(New Foot-Ball de Madrid)’클루브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Club Español de Madrid)’로 분열됐다. 팔라시오스는 클루브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의 회장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훌리안 팔라시오스 회장의 앞에는 재정 문제를 포함해 그가 해결하지 못할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가였지만, 그에게 운동장 사용권과 유니폼을 사주는데 그쳤다.

 

자칫 잘못하면 레알 마드리드는 오늘날과 같은 위대한 클럽이 되기도 전에 사라질 뻔했다. 이때 구세주로 등장한 이는 다름 아닌 두 명의 카탈루냐 형제였다. 바로 파드로스 형제였다.

 

카탈루냐 지방의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파드로스 형제는 1886년에 마드리드로 이주했다. 그의 가족들은 알 카프리초라는 이름을 내걸고 직물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파드로스 형제에게 부를 안겨줬지만, 카스티야 지방의 사회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파드로스 형제는 카스티야 지방과 사이가 좋지 않은 카탈루냐 지방의 바르셀로나 출신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었지만, 자신들의 출신에 가로막혀 그 이상을 꿈꾸지 못했다. 카스티야 지방 사회에서 그들은 그저 돈 많은 바르셀로나 사람들에 불과했다.

 

파드로스 형제는 에스파냐와 카스티야 지방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었다. 이랬던 그들에게 훌리안 팔라시오스를 중심으로 한 클르부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가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서도 동생인 카를로스가 적극적이었다. 카를로스는 클르부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가 자신들이 카스티야 지방 사회에서 인정받게 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팔라시오스 회장과 접촉했다.

 

파드로스 형제는 훌리안 팔라시오스 회장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파드로스 형제가 클럽을 운영하는 자금을 대주는 대신에 자신들이 회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

 

클럽을 경영하는데 어려웠던 훌리안 팔라시오스 회장은 파드로스 형제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바로 클럽을 파드로스 형제의 회사에 존속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쉽게 설명하면 클럽을 구단주 체제가 아니라 기존의 회장을 선출해서 운영하는 방식을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파드로스 형제에게 필요한 것은 에스파냐와 카스티야 지방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었지 클르부 데 에스파뇰의 영원한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파드로스 형제는 훌리안 팔라시오스 회장의 제안을 수락했다.

 

190236, 클럽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는 마드리드 F.C’로 클럽 명을 변경해 공식적으로 창설됐다. 그리고 클럽의 공식적인 첫 번째 회장에 후안 파드로스가 선출됐다. 한 달 후인 1902422일에 마드리드 F.C’라는 이름의 법인이 공식적으로 설립됐다. (여기서부터 글의 통일성을 위해서 마드리드 F.C가 아닌 레알 마드리드로 부르겠다) 호세 산체스 게라는 마드리드 지방 행정 수장의 자격으로 클럽의 법인화를 위한 법규를 승인했고, 이 법은 총 322조로 구성되었다. 17조에 속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7조 축구 진흥을 위하여 당해 법인은 경기를 조직하여 일정 기간 대회를 개최하고 이와 유사한 성격의 행사에 직간접으로 참여한다.”

 

2)에스파냐의 열약한 경제와 사회 분위기

 

훌리안 팔라시오스 회장이 지속적으로 클럽을 운영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그가 경제력이 없는 학생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를 도와줄 후원자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에스파냐가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쿠바와 필리핀 등 식민지를 모두 상실해 경제에 큰 타격을 입었던 게 컸다.

 

에스파냐는 프랑스와 영국, 도이칠란트 등처럼 산업국가가 아닌 식민지에 의존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식민지를 상실한 것은 사실상 그들의 생명 줄이 끊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에스파냐는 농업을 좀 더 중시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막대한 토지를 보유하고 있는 대지주들과 가톨릭교도들의 힘이 막강했다. 대지주들과 가톨릭교도들은 축구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그들의 가장 큰 자산인 땅을 확보하는 데 더 집중했다.

 

그러므로 초창기 레알 마드리드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보예로라는 레프트 윙은 매일 동료들의 신발을 닦고, 골대를 세우기 위해 구멍을 파고 옮기는 작업 등 각종 잡일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클럽을 원활하게 운영하려면 자본가와 대지주 같은 인물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파드로스 형제는 바르셀로나 지방 출신으로 마드리드 태생의 훌리안 팔라시오스 회장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지만, 그들은 레알 마드리드를 운영할 수 있는 자본을 가지고 있었다. 팔라시오스 회장은 파드로스 형제를 통해서 클럽의 재정을 개선하고자 했었고, 파드로스 형제는 레알 마드리드를 통해서 에스파냐와 카스티야 지방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었다.

 

파드로스 형제는 레알 마드리드를 좀 더 확장하기 위해서 사업을 하며 쌓은 인맥을 활용했다. 특히, 동생인 카를로스가 적극적이었다. 카를로스는 국왕 알폰소 13세를 만나 레알 마드리드의 존재를 알렸고, 덕분에 카를로스는 에스파냐와 카스티야 지방의 상류 계층 사람들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레알 마드리드의 재정에 도움을 줬다.

 

당시 에스파냐 사회의 분위기도 레알 마드리드가 구단주 체제의 길로 가지 못하게 했다. 에스파냐는 여전히 국왕이 지배하는 왕국이지만 이들은 두 차례의 공화정을 지냈다. 레알 마드리드가 공식적으로 설립됐던 1902년 당시 에스파냐 사회는 제1공화정의 여파가 여전히 남아있었고, 왕정과 보수층들에 의해 집중된 부와 권력에 대한 분노가 최절정에 달해있었다.

 

특히, 당시 에스파냐의 왕이었던 알폰소 13세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인기가 땅에 추락했을 뿐만 아니라 1902년에 자신이 직접 친정을 시작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원성을 듣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에스파냐 사회 분위기상 특정 인물이 지속해서 권력을 독점하는 것은 어려웠다. 자칫 잘못하면 독재자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훌리안 팔라시오스 회장이 파드로스 형제에게 회장직을 물려줬던 이유는 경제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그의 임기가 오래될수록 그의 입지가 불안해질 가능성이 더 컸기 때문이다.

 

이는 파드로스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바르셀로나 출신이기 때문에 보수적이고 중앙 집권적인 성향이 강한 카스티야 지방 사회에서 파드로스 형제가 레알 마드리드를 영구적으로 소유했다면 엄청난 비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에스파냐 내전의 여파도 무시할 수 없었다. 에스파냐 내전으로 정권을 잡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철저한 독재 정치는 에스파냐 사람들에게 독재에 대한 두려움과 불만을 안겨줬다. 사회적인 분위기 자체가 도저히 구단주 체제로 갈 수 없었다.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장 집권하면서 최고의 회장으로 평가받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도 독재자 논란을 피해 갈 수 없었다. 1943년에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에 부임한 베르나베우 회장이 30년 넘게 회장직을 유지하자, 훗날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이 되는 라몬 멘도사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들에게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으며 회장직에서 사임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이는 플로렌티노 페레즈 회장도 겪었던 일이다. 지난 시즌 페레즈 회장은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이의 자격을 개정하자 일부 소시오 주주들로부터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처럼 죽을 때까지 회장직을 맡고 싶은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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