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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거리]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 이적과 관련된 이야기.

JD 2015.04.30 13:41 조회 2,234 추천 6

안녕하세요 레매 여러분?

이것 저것 뉴스를 보다가, 디 스테파뇨와 관련된 글을 읽게 되어 한번 올려봅니다.


이 글은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난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에 대한 글입니다.


원문입니다. http://www.bbc.com/sport/0/football/28204560


BBC에서 스페인 축구 관련되어 글을 쓰는 Andy West가 지난 2014년 7월 7일에 쓴 글을 번역하였고, 우리가 읽기 쉽도록 의역 해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현 클럽 회장인 플로렌티노 페레즈 회장은 상징적인 방법을 통해 그의 헌사를 언급하였다. 


"단순하게, 디 스테파뇨는 레알 마드리드 그 자체입니다." 


그의 존재는 너무나 강력했기에 그저 "클럽보다 거대함" 이라는 상태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축구의 역사는 실제로 매우 달라질 수 있었다. 


이 마법같은 아르헨티나의 공격수가 스페인으로 옮기는 첫 선택을 할 때, 그의 예정지는 레알 마드리가 아닌 라이벌 바르셀로나였다.


디 스테파뇨의 로스 블랑코스로의 이적과 관련된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롭고, 복잡한 권리 주장, 그리고 거절과 역-거절, 또한 3국가의 5클럽이 거론되는 음모론, 배반의 혐의, 찢겨진 계약서, 그리고 (아마) 독재자의 개인적인 중재까지.


정말 다사다난했다.


1952년의 봄, 당시 디 스테파뇨는 이미 명성을 날리던 선수였다. 

당시 25살의 경기당 약 1득점을 자랑하는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출신의 선수였던 그는 마드리드에서 열린 그의 콜롬비아 클럽인 미요나리오스와 함께 친선 토너먼트를 뛰기 위해 스페인으로 왔다.


그의 퍼포먼스는 숨이 막힐 정도였으며, 즉시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는 계약서 위에 그의 사인을 받기 위해 강하게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 디 스테파뇨의 커리어 스텟 -

우라칸 (아르헨티나) 25경기 10득점

리버플라테 (아르헨티나) 72경기 53득점

미요나리오스 (콜롬비아) 294경기 267 득점

레알마드리드 (스페인) 396경기 308득점

에스파뇰 (스페인) 60경기 14득점

총 847경기 652득점 (경기당 0.77득점)



- 디 스테파뇨의 커리어 -

유럽대항전 5회 우승 (1956. 1957. 1958. 1959. 1960)

프리메라리가 8회 우승 (1954. 1955. 1957. 1958. 1961. 1962. 1963. 1964)

코파델레이 1회 우승 (1962)

대륙대항전 1회 우승 (1960)

아르헨티나 리그 2회 우승 (1945, 1947 리버플라테)

콜롬비아 리그 4회 우승 (1949, 1951, 1952, 1953 미요나리오스)



보다 경쟁으로부터 리드를 갖기 위하여 바르셀로나는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로부터 3년전, 디 스테파뇨의 논란과 함께 떠나버린 콜롬비아 클럽으로의 이적으로 인하여 기분이 좋지 않았던 리버 플라테가 있었다. 따라서 리버 플라테 또한 선수 등록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르셀로나 입장에선 굉장히 복잡한 경쟁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철한 카탈란 국가주의자이자 변호사인 "라몬 트리아스 파가스"가 이끄는 협상과 함께, 바르셀로나는 남미 두 클럽과 느리지만 꾸준하게 협상 절차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바르셀로나는 미요나리오스라는 클럽을 너무 간과하였다. 바르셀로나가 콜롬비아에 거주하는 또 다른 카탈란인 "후안 부스케츠"에게 협조를 요청하면서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오류를 겪게 된다.


후안 부스케츠는 당시 미요나리오스의 가장 큰 지역 라이벌인 산타 페의 디렉터가 된 상황이었고, 그의 존재로 인하여 콜롬비아 클럽은 갑작스레 이적에 대한 동의를 주저하게 되었다. 특히 바르셀로나가 지체없이 거절할 정도의 아주 하찮은 첫 오퍼를 제시했을 때 말이다.


바르셀로나에게 있어 미요나리오스는 확실히 상관이 없었고, 오직 리버 플라테만이 그들과 거래를 나눌 클럽이라고 믿었다. 바르셀로나는 거절된 미요나리오스의 비드를 근본적으로 무시함으로써 원하지 않는 발전을 갖게 되었다.


퇴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대신에, 그들은 디 스테파뇨와 그의 가족들에게 콜롬비아를 떠나 스페인 북동부, 그가 새롭게 정착할 삶과 그의 "새로운" 클럽이 있는, 심지어 1953년 여름 프리시즌 경기를 바르셀로나와 뛰게 될 곳으로 오게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스페인 축구협회는 미요나리오스가 허가하지 않은 이적을 용인할 수 없다며 중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스페인 축구협회는 콜롬비아 클럽과는 관련없다는 바르셀로나의 항소를 기각하였다. 


바르셀로나는 디 스테파뇨의 법적 소유 권한을 가진 리버 플라테와 협상을 체결했다는 그들의 입장을 고수하려고 했다.


그러한 와중에,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불확실해진 상황에서 미요나리오스랑 비슷하게 거래를 한다는 이점을 취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교착상태.



1953년 9월 스페인 축구협회가 결정을 내릴 때, 깜짝 놀랄만한 타협안과 함께 나왔다. 바로 디스테파뇨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첫 시즌과 함께 4년동안 번갈아 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욕을 당한 바르셀로나의 마르티 카레토 회장은 사임을 강요 받았으며, 구단 중간 보드진은 계약서를 파기하였으며, 디 스테파뇨를 레알 마드리드로 보내는 대신 리버플라테에 지급한 4.5M 페세타를 돌려받기로 하였다.



나머지는 사람들이 말하듯 역사 속 내용이다. 


그러나 많은 의문점이 남는다. "왜 바르샤는 미요나리오스와의 거래를 실패했을까?", "왜 스페인 축구협회는 FIFA도 통과한 이적을 허용하지 않았을까?", "왜 바르샤는 그들이 믿는 바대로 밀고 나가지 않고 계약서를 찢었을까?"

겉으로 들어나지 않는 가장 큰 근본적 질문은 프랑코 장군으로까지 연관되었다.


1950년대를 통틀어, 레알 마드리드는 그들의 적으로부터 "프랑코의 팀" 혹은 "정부의 팀" 이라 불렸다. 비록 독재자의 스포츠에 대한 간섭의 크기와 정도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더라해도, 분명한 사실은 그가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인 베르나베아우와 오랜 기간 거래를 했다는 것과 경우에 따라 스페인 축구협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39년부터 1975년까지 스페인을 통치한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장군.



어떤 음모론은 정치적으로 폭발한 시대의 비정상적인 힘을 수반한다. 그 말 또한 이상한게, 그동안 증명되지 않은 주장들이 존재하였다.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바르셀로나 협상가들이 레알 마드리드와의 이중 에이전트를 했다는 것, 즉 디스테파뇨를 마드리드로 움직이게 하려는 고의적 계약 파기 행위를 했다는 등의 주장들이 있었다.


심지어 현재도, 


디 스테파뇨의 스페인 입성에 대한 상황은 독특하게도 대게 감정을 자극하는 소재이다.


바르셀로나의 팬들은 암흑 정치 세력에 의하여 강도 당했다고 믿는다. 클럽의 공식사이트는 비통하게 한탄한다. "프랑코 정권이 배후로 있는 이상한 연방의 조작"이라고 말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서포터들은 부정적인 계약이라는 주장에 대한 분개함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은 프랑코 정부의 도움이 아닌, 간단하게 말하자면 바르셀로나의 너저분함으로부터 이점을 챙겨온 것 뿐이라고 주장한다.


문제에 대한 진실이 어떻게 되든, 결과적으로 디 스테파뇨는 레알 마드리드로 옮겼고, 프랑스 클럽 낭시와 1953년 9월 23일 친선 경기를 통하여 데뷔를 하였다.


한 달 뒤, 첫 엘 클라시코가 베르나베우에서 열렸다. 레알은 5:0으로 승리하였으며, 디 스테파뇨는 4득점을 하였다. 전설의 시작이었다.




당시의 레알 마드리드 팀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클럽팀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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