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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시티목요일 5시

축구도 어차피 멘탈 게임 아니겠습니까.

noname 2015.02.12 02:25 조회 2,409 추천 22



한 게임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의 수치를 100으로 잡아본다면. 축구장 전체를 바라보며 그리는 큰 그림들, 전략적인 차원에서의 선수 배치와 운용, 또한 미시적으로 움직이는 선수들의 부분 전술과 특징적인 선택들이 50, 그리고 해당 지시를 수행하는 선수들 개개인의 기분과 컨디션같은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50정도를 차지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냥, 예전부터 생각하던거지만, 1주일 168시간 중에 저희가 선수들을 보는 시간은 기껏해야 1시간 30분. 많으면 3시간이 전부니까요. 어떤 훈련을 하는지, 무슨 계획을 세우는지 도통 알 수가 없고, 정말 특징적인 몇몇 요소들을 제외하면 이게 준비된 움직임인지 뭔지도 판단하기가 어렵고....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카를로스의 아리랑 크로스를 역사에 남을 발리 슛으로 연결시킨 지단을 봤을 때 든 생각인데. 누군가는 좌측면을 꾸준히 공략함에 더 나아가 엔드라인까지 적극적으로 오버래핑을 지시한 감독의 전술적인 승리라고 평할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그냥 에라 모르겠다. 뛰기도 피곤하다. 하고 날린 카를로스의 크로스가 정말 우연히 지단에게 향한, 그리고 그 볼을 주저없이 슈팅으로 연결한 지단의 완벽한 스킬과 대담성이 어우러진 골이라고 생각해요.


그 뒤로는 다소 우스운 생각들이 들 때가 많더라구요. 그냥 뭐, 지루도 좋은 위치에 있는데 굳이 우측면의 카솔라에게 공을 보내는 일이 잦다면, 이게 벵거 감독의 전술적인 지시일 수도 있지만. 카솔라가 잘 되가는 여자가 있는데 오늘 꼭 골을 넣어서 완전 작업 종지부를 찍어버리겠다는 얘기를 라커룸에서 했나... 싶은 그런 생각이 드는거 있잖아요. 물론 이정도로 막장스럽게 흘러가지는 않겠습니다만.



일정한 전략에 따라 영혼없는 돌들이 짜임새를 갖춰 압박하는 바둑과는 다르게, 감정과 영혼을 가진 11명의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스포츠니까요. 어쩌면 나초는 오늘 아침에 아내한테 뺨 한 대 맞고 왔을 수도 있고, 그래서 전술 설명을 좀 건성으로 들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크로스는 오늘 동생이 대학에 수석 합격해서 기분이 엄청 좋을 수도 있고. 코엔트랑은 면도 하다가 턱을 좀 베여서 오늘 날이 좀 아닌데...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그냥 단지 전술과 전략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궁무진한 요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선수 관리라는 측면 역시 감독의 가장 중요한 덕목중 하나겠죠. 



저는 작은 광고 대행사를 하나 운영하고 있는데, 작은 기업의 대표들, 혹은 큰 기업의 임원들과 계약 건으로 시작해서 사적인 얘기를 듣고 있자면 정말 유쾌한 경우가 많습니다. 작게는 몇십명, 크게는 몇백명을 운영하는,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고 많은 부하 직원들의 존경과 시샘을 받는, 겉으로 보기엔 정말 대단한 이 사람들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들에 컨디션이 좌우되고, 업무 처리를 더디게 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면요.


물론 정말 세계에서 손꼽히는 기업의 오너들, 능력자들이 매일 이러진 않을껍니다. 그러니까 그 위치에 올라왔겠죠. 하지만 그들이라고 매일같이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고, 하나의 실수조차 없는 하루를 보내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걔들도 사람이잖아요.


생각해보면, 얼마 전 헤어진 여자친구가 바로 다른 남자를 만나서 속을 뒤집어 놓으면 저같아도 일이 손에 안잡힐 것 같습니다. 거액의 계약을 맺은 프로 선수인 것도 맞는데, 그 전에 사람으로 태어났잖아요.



얘기가 좀 많이 샜는데, 사람이 하는 스포츠인 축구는 전술과 전략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변수들이 정말 수도 없이 개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성공 뒤에는 전술적인 성공이 있고, 모든 실패 뒤에는 전술적인 실패가 있지만. 전술적으로 성공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전술적으로 실패한다고 해서 반드시 실패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0점짜리 전술을 써도 선수들의 컨디션이 최고고, 사기도 최고라면 60점짜리 팀은 되는걸요 뭐.


저의 365일을 생각해보면, 한 50일쯤은 기분도 상태도 좋은 것 같고, 100일쯤은 그냥 그렇고, 나머지는 전부 별로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러니까 이렇게 살고 있겠습니다만.... 아니 이렇게 사니까 상태 분포도가 저런건가.... 어쨌든 저는 선수들 개개인도 이런 싸이클을 갖고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이 선수들이 모인 팀도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이런 싸이클을 갖고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그저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수준의 팀은 50일쯤 좋고, 100일쯤 그저 그렇고, 나머지는 다 최악일꺼고... 마드리드같은 최고의 팀은 마음같아서는 한 300일쯤은 최상이였으면 좋겠네요.


감독과 코치들은 물론 양측면 다 신경을 써야겠죠. 선수들 컨디션이 좋지 않더라도 전술적인 우위를 통해 경기를 쉽게 풀어내기 위해 상대를 분석하고, 지엽적인 움직임까지 세세하게 지시를 해줘야 할 것이며. 선수들이 항상 평온한 마음과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식단 관리부터 개개인 면담까지 입맛에 맞게 처방을 해야 하구요.


축구도 어차피 멘탈 게임 아니겠습니까. 실패에서 전술적인 이유를 찾는 것도 좋고,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도 좋습니다만, 그냥 가끔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나머지 50에 탓을 돌리는 것도 차라리 속이 편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오늘은 허리가 아파서 거의 최악의 하루를 보냈는데, 내일 병원가서 물리치료 좀 받으면 허리도 낫고, 몸도 가뿐한 최고의 하루를 보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역사적인 연승을 기록한 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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