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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피카수요일 5시

이번 월드컵 전술 트렌드에 대한 잡설

라그 2022.12.11 16:06 조회 6,009 추천 5



 2000년대 초중반의 전술 키워드는 '수비와 역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전까지는 전통적인 10번 에이스 축구가 대세였습니다. 안첼로티가 지단을 앞세운 4-3-1-2의 영향은 지대했죠. 전통적인 에이스 축구,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의 화려한 플레이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는 아트 사커로 프랑스가 유로 2000을 우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죠. 유로를 우승시킨 오토 레하겔의 그리스, 언더독이었던 무리뉴의 포르투나 첼시 등 철저하게 수비를 굳히고 빠르게 역습하는 팀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적인 카테나치오긴 했지만 2006년 이탈리아의 월드컵 우승 역시 어떻게 보면 같은 노선을 탄거죠. 



 물론 화려함을 자랑하는 최상위권 팀들은 여전히 지단, 호나우지뉴, 카카 등을 앞세우며 기존의 전술로 챔피언스 리그나 월드컵 등에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펩 과르디올라라는 새로운 천재가 등장하면서 크루이프의 토털 풋볼을 계승, 2010년대 초중반의 키워드는 '볼 소유'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볼 소유를 지속하는 건 그대로 공격 횟수로 이어진다는 철학이었죠. 무리뉴의 인테르나 레알 등에 한방 먹기는 했지만 보는 눈을 황홀하게 만드는 패스워크는 많은 축구인을 매료시켰고, 그렇게 할 역량이 없는 팀조차 '티키타카'를 따라하는 대 유행을 불러옵니다. 바르셀로나의 전술을 등에 엎은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이 황금 세대를 이끌고 유로와 월드컵을 싹쓸이해버리고, 펩의 영향을 짙게 받은 뢰브의 독일이 2014년 월드컵을 우승하죠.



 단순히 펩 스타일의 축구를 하지 않더라도, 빌드업 과정의 세밀함이나 전방에서의 볼 소유 등 펩이 축구 전술에 미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무리뉴조차 과거와 달리 좀 더 세밀한 전개를 하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의외로 펩이 만든 전술은 그 유행만큼이나 빠르게 반격을 맞이했습니다. 



 201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호날두, 음바페를 앞세운 프랑스나 레알 마드리드가 챔피언스 리그, 월드컵을 휩쓸었지만, 이는 뛰어나고 유니크한 선수의 질적 퀄리티와 감독의 유능함에서 비롯된 것이지, 어떤 전술적 유행을 가져 왔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유행하기 시작한 건 클롭, 투헬, 시메오네, 콘테 등으로 대표되는 공간을 넓게 쓰면서 '압박과 활동량'을 내세우는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축구입니다. 콘테의 백3, 시메오네의 두줄 수비 등 과거의 전술을 계량한 새로운 전술적 유행들도 생겨나고요. 이러한 전술은 분명 효과적이었고 플릭의 바이언, 클롭의 리버풀 등이 챔스 대권을 차지하며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새로 어떤 전술이 탄생, 개량, 유행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월드컵을 보면서 어떤 편린을 조금 느꼈습니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길게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서문으로 적었는데요. 모로코나 크로아티아, 일본 등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수비를 굳히고 날카롭게 역습을 하는건, 20년 전 수비역습 전술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역습 과정에서의 능동적인 빌드업, 그리고 공격 -> 수비 상황에서의 놀랍도록 빠른 변화입니다.   



 저는 이걸 '전환'이라고 표현 하고 싶네요. 기존 무리뉴의 역습 축구는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할 때의 속도를 극단적으로 높이는걸 추구했습니다. 역습 상황이 가장 상대 진영의 수비수가 적은, 방어력이 낮은 순간이라는 철학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인 주력이 빠른 선수, 조콜 로벤 더프 등을 선호했죠. 물론 지금도 모로코나 크로아티아의 역습은 충분히 빠르고 날카롭습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변한게 있다면, 바로 '공격'에서 '수비'로 전환할 때의 속도가 예전보다 훨씬 빨라지면서 공격 작업에 있어서 더 많은 선수가 역습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그 상황에서의 수비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에 포백과 2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는 항상 남기거나, 아예 두세명의 선수만 역습에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이는 시메오네의 버스 두줄 전술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일부 팀들은 역습 시에 많은 선수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공격을 하는 동시에, 수비시에는 공격 진영으로 올라갔던 선수들이, 공을 빼앗기자마자 우르르 와서 두줄 수비나 텐백을 만듭니다. 국대 축구가 비전술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제 인식을 깰 정도로 인상적이었네요. 



 이러한 배경은 '활동량'으로 대표되는 최근 트렌드를 선수들이 받아들였고, 더 강한 팀을 이기기 위해 그에 따른 빠른 공수전환이 가능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공격 갔다가 복귀할 때는 모두 죽어라 뛰는거죠. 과거 텐백 유형의 역습 전술은 어찌되든 점유율을 기반으로 하는 팀에게 죽어라 두들겨 맞다가 뒷공간을 찔러서 이기는 것이 승리 패턴이었습니다. 이기면 다행이지만 호나우지뉴나 메시 같은 압박과 수비로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선수에게는 두들겨 맞고 지는 일도 허다했죠. 



 하지만 이번 월드컵에서의 '전환' 축구는 공격 시에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가 많기 때문에 볼을 쉽게 잃지도 않고, (비록 체급 차가 워낙 나고, 스트라이커 역량이 허접해서 120분 승부차기 축구가 되버렸지만) 상대도 무작정 공격만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유도해서 상대의 공격력마저 감소시킵니다. 그리고 수비 상황이 되면 빠르게 복귀해서 다시 벽을 만들어냅니다. 그야말로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걸 역습 축구에서 실현시키고 있네요. 아무리 체급 차가 나는 팀이어도 수비를 굳힌 팀을 뚫는 것은 원래 어려운 거고, 자칫 공격에 집중하다 보면 한방을 얻어맞을 수 있게 되는거죠.



 어떻게 보면 이건 같은 공간 안에 최대한 수적 우위를 늘리는 축구 전술의 철학을 그대로 계승해서 발전시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많이 뛰는 축구의 극한이기도 하고요. 체력적인 문제도 있고, 이런 능동적인 역습 축구가 클럽에서 유행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하이브리드한 축구를 구사하는 하인케스나 지단, 안첼로티는 클럽에서 비슷한 모습을 종종 보여주기도 했으니 이번 월드컵에서의 여러 이변은 전술가들에게는 꽤나 재밌는 상황 아닐까도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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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1

arrow_upward 음바페는 월드컵 한번 더 먹으면 위상에 큰변화가 올것 같아요. arrow_downward 메시와 호날두는 말년으로 갈수록 격차가 벌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