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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수나일요일 2시

데르비 얘기

온태 2020.02.03 17:37 조회 3,328 추천 69
지단이 수페르코파에서 5미들을 꺼냈던 건 아자르에 이어 벤제마까지 스쿼드를 이탈했었기 때문입니다. 어태킹 써드에서 볼을 유의미하게 소유할 수 있는 선수를 모두 잃었기 때문에 미들에 테크니컬한 선수들을 죄다 때려박고 미들 써드에서의 지배력을 극대화하여 리스크 테이킹을 최소화하는 편이 속도 낸답시고 중구난방으로 뛰어대다 턴오버로 잦은 전환 국면을 맞이하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한 겁니다.

수페르코파 결승에서의 아틀레티도 이 5미들에 고전한 팀이었습니다. 미들에서의 강한 대치 국면을 전혀 마다하지 않는 시메오네답게 결승에서도 자신의 미들을 레알의 미들에게 강하게 붙였고 수비를 뒤로 물리면서 전진이 느릴 수밖에 없는 5미들 시스템의 약점을 활용하고자 했으나 간격이 벌어지면서 레알의 미들을 효과적으로 압박하지 못했고 잘게잘게 썰어들어오는 레알 미들의 전진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해 수비 앞 공간을 자주 허용했습니다. 자연히 체력 소모는 늘어나고, 훨씬 빠르고 강한 선수단의 육체적 우위를 살리지 못한 채 연장 막판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승부차기까지 끌려가며 트로피를 내주게 되었습니다.

비록 벤제마가 돌아왔지만, 아자르 없이 터프한 아틀레티의 저항을 이겨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던 지단은 다시 한번 5미들을 꺼내들었습니다. 지난 수페르코파 결승처럼 상대 미들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면 좀 느리더라도 벤제마에게 볼을 전달할 수 있을 거란 의도였고, 요비치보다 훨씬 리딩이 좋은 벤제마라면 전진한 미들과의 협업을 통해 성과를 낼 수도 있으리란 계산까지 했을 겁니다. 그러나 시메오네의 대응은 저번과는 달랐습니다.

수페르코파 결승 아틀레티 센터백 히트맵

리가 아틀레티 센터백 히트맵

수페르코파 결승 아틀레티 미들 히트맵

리가 아틀레티 미들 히트맵

각각의 히트맵을 비교해보면 이번 경기에서 아틀레티의 센터백은 수페르코파 결승에 비해 전진했고, 미들은 덜 전진했습니다. 미들과 수비 간 간격을 이전에 비해 많이 좁혔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잔뜩 좁혀선 후 아틀레티는 레알이 공을 잡고 미들 써드로 전진할 때 미들 써드를 내주고 아예 바짝 내려앉았습니다. 자신들의 공격수들도 하프라인 아래로 내리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 골문 30m 앞 지점까지 공격수들을 내려 수비하기도 했습니다.

수페르코파 결승 플레이어 포지션

리가 플레이어 포지션

선수들의 평균 위치를 표시한 플레이어 포지션 항목을 보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두 그림 모두 주황색이 레알, 파란색이 아틀레티입니다. 수페르코파 결승에 비해 이번 리가 경기에서 센터백을 제외한 아틀레티 선수들의 평균 위치는 대부분 내려와 있습니다. 10번의 앙헬 코레아를 제외하면 투톱으로 출장했던 모라타와 비톨로까지 하프라인에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틀레티가 내려선 만큼 레알 선수들의 평균 위치도 내려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페르코파 결승에선 그래도 포지션 별 차이가 약간씩 보입니다만, 이번 리가 경기에선 센터백 둘과 카세미루를 제외하고는 모두 같은 라인에 넓게 펼쳐 서 있습니다. 아틀레티의 저지선에 가로막혔단 의미입니다.

수페르코파 결승 레알 드리블

리가 전반전 레알 드리블

수페르코파 결승 아틀레티 태클

리가 전반전 아틀레티 태클

수페르코파 결승 레알 소유권 상실

리가 전반전 레알 소유권 상실

이렇게 아틀레티가 레알의 어태킹 써드 앞에 진을 치고 출입을 봉쇄하자, 레알의 5미들은 그 의의를 잃었습니다. 속도를 포기하고 미들 지배력을 극대화한 시스템인데 아틀레티가 미들 써드에서 상대를 안해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레알의 전진은 번번히 아틀레티의 저지선이 형성된 곳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고 그 결과가 위의 그림들입니다. 아틀레티가 미들 싸움에 적극적으로 임해줬던 수페르코파 결승전의 그림들을 보면 레알의 드리블 시도와 소유권 상실, 아틀레티의 태클 시도는 대부분 아틀레티의 박스 근처에서 발생했었습니다. 미들 써드에서 상대 미들을 제칠 수 있으니 어태킹 써드까지 전진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번 경기 전반전의 그림들을 보면, 앞서 말한 것처럼 아틀레티의 저지선이 형성된 곳에서 대부분의 경합이 일어났고 그 저항을 도무지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나마 발베르데와 모드리치가 배치된 오른쪽에서 속도를 붙여보려 했지만 아틀레티도 그걸 모를 팀은 아니었고 별 부담없이 막아냈습니다.

전반에 상대를 전혀 공략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단은 플랜을 바꿔야만 했습니다. 5미들로 상대 체력을 갉아먹고 빠른 윙들을 교체투입해 지친 상대를 공략하는 플랜을 당연히 준비해 왔을 테지만, 플랜에 따른 변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과감한 수를 필요로 했고 결국 팀의 핵심 축인 크로스를 교체하는 결정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후반전 플랜은 이 경기의 것과 완전히 같습니다. 빠르고 강한 상대를 맞아 스쿼드에서 가장 빠르고 부지런한 선수들을 집어넣고 전면적인 기동전을 펼쳐 측면을 통해 최대한 빠른 전진을 노립니다. 당연히 필드 곳곳에서 개싸움 양상이 벌어지고 잦은 전환이 발생합니다. 비록 빌드업 리더로서 더 이상 모드리치는 크로스에 비해 나은 게 거의 없지만, 오픈 게임 운영만큼은 근본적으로 모드리치가 더 낫습니다. 타고난 어질리티가 크로스에 비해 월등하고, 토트넘에서 영국식 오픈 게임을 몸소 겪으며 성장해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드리치는 이젠 언제라도 기동력 부하가 드러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에이바르 전과 마찬가지로 바스케스와 발베르데를 옆에 붙여 그걸 최소화시키는 안배도 같이 가져갔습니다.

득점은 그간 팬들에게 좋은 평을 받지 못하던 선수들이 완벽한 플레이로 만들어냈다는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만, 한편으론 지단의 전술적 노림수가 완벽하게 통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와이드하게 벌려선 비니시우스를 통해 상대 저지선에 틈을 만들고, 풀백-윙 간 콤비네이션으로 상대 측면을 부쉈으며, 그 속도와 폭으로 인해 벌어진 박스 안 틈을 공격수가 정확하게 찾아들어가며 마무리하는 일련의 과정은 그 기술적 완성도를 제하더라도 굉장히 아름다운 골이라 할 만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경기 끝나고 몇번을 돌려보며 감탄한 장면입니다.

레알이 측면을 통한 기동전을 걸어오자 아틀레티 역시 측면을 보강하며 대응에 나섰습니다. 이번 경기에서 아틀레티의 교체 카드 3장은 모두 윙 카드였습니다. 후반 시작하고 레알의 변화를 보자마자 모라타를 빼고 르마를 투입한 것처럼 그 대응도 제법 과감하고 즉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13-15년의 아틀레티도 아니고 번번히 측면 자원 보강에 실패한 최근의 아틀레티가 한층 젊고 빨라진 레알의 측면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레알의 변화에 대응을 했음에도 끊임없이 밀리고 실점까지 기록하자 그나마 느린 모드리치 방향을 겨냥하고 자신들의 왼쪽에 공격 역량을 몰빵했지만 지단은 60분을 넘어서는 시점에서 모드리치와 발베르데의 방향을 바꿔 아틀레티의 왼쪽 공략을 완전히 저지시켰습니다.

결국 아틀레티는 후반에 토마스 파티의 의미없는 중거리 슛 한방을 제외하곤 어떠한 슈팅도 기록하지 못한 채 완전히 침몰했습니다. 미래에 이 경기가 시메오네 아틀레티의 사이클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경기였습니다. 반면 레알은 지단 1기에 비해 훨씬 다재다능한 스쿼드를 기반으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통해 데르비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완전히 다른 축구를 준비하기까지 하프타임의 짧은 시간밖에 없었음에도 이를 경기장에서 완벽히 실행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평소 훈련장에서부터 이런저런 전술적 시도에 대해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방증이며, 이를 실전에서 과감한 타이밍에 시도하여 성공시킨 지단의 전술적 용단과 역량이 돋보인 경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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