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패인과 토니 크로스
독일이 잘 풀릴 때의 경기 양상을 보면 상대팀을 본인들의 어태킹 서드 안에 가둬놓고 쥐어패는 그림이 대부분입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전적으로 토니 크로스 덕분입니다. 빌드업 리딩에 있어 현역 중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 있는 크로스가 아주 탄탄하게 공을 위쪽으로 끌어올려주기 때문에, 독일의 다른 선수들은 매우 높은 위치까지 전진해 공격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크로스가 완전무결한 선수는 아니라는 겁니다. 축구팬들 사이에서 크로스는 때때로 전문가나 주변 선수들의 평보다 저평가되는데, 이는 크로스의 장점이 눈에 확 들어오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느리고 민첩하지 못하다는 피지컬적 약점이 종종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월드클래스 선수답게 높은 수준의 테크닉과 움직임으로 이를 극복하곤 있지만, 상대가 아주 타이트하게 압박을 가할 경우 이러한 신체적 한계가 크로스의 장점을 최대로 발현하는 데 발목을 잡기 때문에 크로스를 중용하는 팀은 이런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토니 크로스가 활약했던 팀들은 이런 대비책을 아주 잘 갖춘 팀들이었죠.
어제의 멕시코는 독일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크로스 중심의 빌드업 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왼쪽을 틀어막고 공격 방향을 강제로 오른쪽으로 한정시키는 압박 방식을 채용합니다. 멕시코는 수비 시 4-4-2를 형성했는데, 독일이 후방에서 볼을 잡을 때 멕시코의 투톱인 치차리토와 벨라는 각각 훔멜스와 크로스에게 달라붙었습니다. 때문에 독일의 후방 전개는 대부분 보아텡의 발에서 시작되었고, 자연스레 독일의 공격 방향은 오른쪽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독일의 오른쪽은 주공으로서의 파괴력을 갖추지 못한 위크 사이드라는 데에 있었습니다.
독일의 오른쪽이 스트롱 사이드가 될 수 없는 이유는 크로스를 활용하기 위한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크로스의 주 활동 영역은 센터서클 좌측 부근입니다. 때문에 크로스를 활용하는 팀의 좌측면 선수들은 온볼 상황에서의 파괴력과 영리한 움직임이 수반되는 선수들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빌드업 리더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고, 강한 압박에서도 크로스에게 믿을 만한 선택지가 되어 크로스를 보호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좌측면에 팀의 온볼 역량이 집중되기 때문에, 상대 수비도 그에 따라 한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스레 반대편 사이드는 넓은 공간을 확보하게 되고, 적재적소에 사이드체인지가 진행될 경우 이쪽 측면의 공격은 반대편에 비하면 한결 편한 상태에서 진행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이쪽 측면에 서는 선수들은 세밀한 테크닉보다는 활동량과 근면함이 우선적으로 요구됩니다.

실제로 독일이 잘 풀릴 때의 패스맵을 보면 이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위 패스맵은 지난 3월 대 스페인전 패스맵인데, 슈테겐 대신 노이어가, 헥토어 대신 플라텐하르트가 들어간 걸 빼면 멕시코전과 정확히 동일한 라인업입니다. 빌드업을 주도하는 크로스 주변으로 많은 선수가 모여있고, 우측면은 킴미히가 거의 전담하면서 2선 선수들이 간간히 도와주는 형태가 대부분이죠. 이 경기 독일은 디펜딩 챔피언이자 이번 월드컵 우승 후보로 꼽히기에 이견이 없을 만한 경기력을 선보였습니다.

이건 멕시코전 패스맵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보아텡이 후방에서의 볼 전개 대부분을 책임졌고, 이는 우측면의 키미히에게 거의 집중되었습니다. 공격이 우측면에 집중되다보니 자유롭게 로밍할 때 그 역량이 극대화되는 뮐러는 우측면에 고정될 수밖에 없었고, 중원에서 궂은 일과 1차 압박을 담당해야 할 케디라도 안풀리는 우측 공격을 위해 자주 전진해야만 했으나 온볼 파괴력이 변변치 못한 친구들이 크로스의 적재적소에 터지는 사이드체인지 패스도 없이 측면 공략에 나서봐야 좋은 결과물을 가져올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쪽 측면에 공이 집중되자 지나치게 전진하다가 뒷공간만 신나게 내줬죠.
이런 양상에서 가장 아쉬웠던 게 왼쪽 풀백인 플라텐하르트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크로스가 견제를 받을 경우 이를 왼쪽 측면의 선수들이 나서 분산시켜줘야 독일의 플랜이 제대로 실행되는건데 플라텐하르트는 라윤 하나를 상대하는 것도 굉장히 버거워해 크로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위의 멕시코전 패스맵만 보더라도 플라텐하르트는 굉장히 고립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플라텐하르트에게 향한 화살표는 아주 희미한 실선 세개가 다고, 플라텐하르트에게서 나온 화살표는 드락슬러에게 향한 하나가 전부입니다. 그럼에도 매번 높은 위치까지 전진해서 역습 시 저지 역할도 제대로 못했고요. 훨씬 영리하고 기민한 헥토어가 정상 컨디션으로 나왔다면? 이라는 의문이 따라붙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 독일의 패배로 시스템의 문제다, 감독의 보수성이 문제다 등등 굉장히 많은 얘기가 나오는 걸로 아는데, 개인적으로 멕시코가 대비를 굉장히 잘했고 독일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스페인과 당당하게 맞다이를 뜨던 팀이고, 예전 대회와 선수들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지만 이 선수들 대부분이 아직 전성기를 구가할 나이라는 점에서 딱히 보수적인 선수 기용이 문제였다고 보이지도 않네요. 다만 마지막 평가전 즈음부터 보이던 전체적으로 헐거워진 수비 시 집중력과 협업이 본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향후 경기들에선 반드시 보완해야 할 겁니다. 훔멜스도 그런 뉘앙스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고요.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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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포도 2018.06.18*정말 벨라가 경기 내내 크로스만 쫓아다니더군요.
후방 빌드업에서 라볼피아나 전형으로 펼쳐질때도 보아텡은 그냥 내버려둔채로 크로스에게만 공이 안가게 집중마킹.
크로스가 벨라를 피해서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여보지만 끈질기게 쫓아와서 마킹했죠.
심지어 크로스 주특기중 하나인 측면 패스나 컷백받고 원터치 슈팅조차도 시도하지 못하게 하더군요. 크로스가 박스앞까지 올라가서 양손 든걸 보자마자 벨라가 뛰어와서 다시 크로스 마킹...
거의 예전 박지성이 피를로 따라다니는걸 보는것같았습니다. -
subdirectory_arrow_right 아센시옹 2018.06.18@빨간포도 공감합니다. 보아텡의 롱볼 정확도가 괜찮아서 다행이었지 그것마저 끊겼으면 점수차는 더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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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실바와라 2018.06.18근데 전 뢰브감독의 보수성도 맞다고 봅니다 스페인도 그렇게 실패한적있고 대신
뢰브감독은 좀더 전술에 유연하니까 스페인처럼 쉽게 탈락할꺼 같진 않지만요 -
레알유스출신 2018.06.18멕시코가 전반부터 오버페이스 하여서 후반에 국면이 전환될 줄 알았는데, 독일은 역시나 골게터의 부재가 많이 아쉽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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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축이석호선생 2018.06.18왼쪽 사이드가 완전 잉여가 되어버려서 답답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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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 2018.06.18크로스의 약점이 익히 알려진 것이고 오른쪽에 뮐러, 외질 등의 선수가 있었음에도 주공의 파괴력을 갖지 못한 것이라면 독일의 대처 미흡이 맞다고 봅니다. 플랜A가 통하지 않을때 플랜B 정도는 가지고 있었어야 했어요. 독일은 멕시코에게 실력으로 패배했습니다. 경기 내용에 비해 실점이 적었다는게 그나마 위안거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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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directory_arrow_right 온태 2018.06.18@보나 그래서 후반에 팀 간격도 좁히고 플라텐하르트는 도저히 답이 없으니 로이스 오른쪽에 배치해서 우측면 속도를 끌어올리게 하고 등등 뢰브 입장에서 할 수 있는건 했죠. 좀더 빠른 타이밍에 과감하게 승부하지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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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jamin Ryu 2018.06.18전체적으로 공감합니다. 지난 리버풀전도 그렇고 토니가 빠른 템포의 압박에 대처하는 능력에 약점을 보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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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스5연패 2018.06.18라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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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바할 2018.06.19교수님도 사람인지라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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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리가리날둥 2018.06.19글 좋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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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 2018.06.19멕시코가 워낙 잘 준비하고 나온 것 같아요. 독일은 스웨덴전에 임하는 각오가 상당할 것 같은데, 그거 잘못하면 정말 삐끗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스웨덴이 득점은 몰라도 수비는 잘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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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베날 2018.06.19좋은 분석글이네요. 멕시코가 독일의 빌드업의 중심인 크로스를 막기위한 전술을 되게 잘 설명해주신듯. 거기에 언급하신대로 플라텐하르트의 퀄리티가 아쉬운것도 큰 몫 한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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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coAlarcón 2018.06.23네임밸류로 보나 실제 축구력으로 보나 독일 대표팀의 가장 약한 포지션은 왼쪽 수비라고 느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