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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축구의 황제 레몽 코파, 이제 평온히 잠들다

Benjamin Ryu 2017.03.03 19:52 조회 1,433 추천 4

201716. 이날 레알 마드리드와 그라나다의 경기를 본 사람들인 기억할 것이다. 이날 경기의 묘미는 경기가 아닌 경기 전에 있었던 발롱도르 수상식이었다. 선수 시절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었던 지네딘 지단과 루이스 피구, 호나우도 등이 초대되었지만, 이날 행사에서는 정말 반가운 사람이 방문했다. 바로 3대 발롱도르의 수상자이자 프랑스 축구의 첫 번째 황금기를 열었던 레몽 코파가 크리스티아노 호나우도를 축하하기 위해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방문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 프랑스와 레알 마드리드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레몽 코파가 만8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선수 시절 프랑스 축구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렸던 그는, 이제 평온히 잠들었다.

 

레몽 코파가 워낙 오래된 선수이다 보니 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는 과거 블로그에 그에 대해서 길게 쓴 적이 있었지만, 오늘은 비교적 간략하면서도 자세하게 그의 선수 시절을 다루겠다.

 

1)손가락이 절단된 폴란드계 프랑스인

 

레몽 코파는 19311013, 프랑스의 뇌레멩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레몽 코파세프스키였는데, 초등학교 시절에 그의 이름이 너무 길다는 주변인들의 지적받자 그렇다면 내 이름을 간단하게 레몽 코파라고 부르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그 이후부터 사람들은 그를 간단하게 레몽 코파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코파는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가난한 폴란드계 프랑스 이민자 출신이었던 레몽 코파의 집안은 가난했다. 특히, 그가 8살이 되던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프랑스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끌었던 도이칠란트에 의해서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전쟁으로 인해서 프랑스의 건물 및 산업시설이 폭격으로 무너지자 코파의 집안은 광산업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어린 코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쟁이 끝나던 1945년에 14살이 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함께 석탄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산업 일은 매우 힘들었다. 무엇보다 광산업일은 그와 그의 가족들의 생명을 갉아먹었다. 코파는 어린 시절 석탄 광산에서 좁은 통로를 통해 수레를 미는 일을 했었는데, 이때 규산 가루를 너무 많이 마셨던 게 문제였다. 훗날, 코파는 이때 많이 마신 규산 가루가 문제가 되어서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극심한 병에 걸렸고,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의 한 손가락을 절단해야만 했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56살에 규폐증(규산이 들어있는 먼지를 오랫동안 마셔서 폐에 규산이 쌓여 생기는 질환. 주로 채광업과 채석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이 걸리는 질환이다)에 걸려 사망했고, 그의 형제 역시 아버지와 같은 규폐증으로 64살에 사망했다.

 

17살이 된 레몽 코파는 광산업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다가 1949년에 프랑스의 유소년 선수 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코파는 이 대회에서 어느 정도 자신의 존재감을 클럽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지만, 그의 영입에 관심 있는 클럽은 오직 앙제 SCO뿐이었다. 결국, 코파는 17살에 앙제와 계약을 맺었다. 당시에 다른 클럽들이 레몽 코파에게 계약을 제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키가 작아도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코파의 키는 당시 165cm에 불과했는데, 그가 성인이 되었던 20살 때 키는 169cm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축구계는 지금보다 키를 중요시하는 부분이 강했고, 그가 원했던 프랑스 북부의 클럽들은 그의 작은 키가 오히려 최대의 장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2)스타드 랭스로 이적하다

 

앙제에서 2년을 뛴 레몽 코파에게, 당시 프랑스 컵 우승팀이었던 스타드 랭스가 앙제에게 코파의 이적료로 180만 프랑을 제의했다. 코파는 20살이 되자 그는 한 달에 14.50파운드에서 180파운드를 받게 되었고, 그의 집안은 더 이상 석탄 광산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비록 작은 키를 가진 레몽 코파였지만, 석탄 광산에서 일했던 그의 경험은 그에게 탄탄한 하체 힘을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코파는 뛰어난 드리블과 기술을 선보이며 관중들을 열광시켰다. 하지만 코파의 장점은 바로 이 같은 기술력보다도 경기를 이끌고 흐름을 판단하여 승리로 이끌었던 운영 능력이었다. 그는 1951/1952시즌에 스타드 랭스로 이적한지 2년 만에 팀을 1952/1953시즌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스타드 랭스를 비롯한 프랑스 사람들은 코파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고, 그는 많은 이들에게 사령관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레몽 코파의 질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2년 후인 1954/1955시즌에 팀을 다시 리그 앙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스타드 랭스는 1955/1956시즌 유로피언 컵 티켓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955/1956시즌 유로피언 컵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3)그의 인생을 바꾼 경기

 

1955517, 에스파냐 언론사인 마르카는 그를 작은 나폴레옹이라고 불렀다. 그의 키가 169cm로 과거 프랑스의 황제였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키(나폴레옹의 키는 대중들에게 160cm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키는 169cm~170cm)처럼 크지 않아서 그렇게 불렀던 이유도 있었지만, 나폴레옹이 생각될 정도로 뛰어난 경기 운영 능력 때문이었다. 프랑스를 점령한 이 작은 나폴레옹은 이제 스타드 랭스를 이끌고 유럽을 정복하러 나섰다.

 

레몽 코파는 소속 팀인 스타드 랭스를 이끌고 유로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했다. 스타드 랭스는 프랑스에서 최초로, 또 우승 자격을 갖춘 유로피언 컵 초창기 팀이었다. 코파가 이끌던 스타드 랭스는 16강에서 노르웨이의 오르후스 GF를 만났다. 그들은 오르후스를 총합 4-2로 꺾으며 8강에 진출했고, 8강에는 당시 유럽 최강의 전력을 가지고 있던 팀 중 하나인 보로스 로보고라는, 헝가리 팀을 만났다. 코파가 이끌던 스타드 랭스는 종합 8-6으로 승리하며 간신히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 스코틀랜드 클럽인 하이버니언을 만난 스타드 랭스는, 종합 3-0으로 무난한 승리를 거두며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 상대는 레알 마드리드였다.

 

1956613,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의 파크 데 프랭스에서 유로피언컵 결승전이 열렸다. 스타드 랭스는 경기가 시작 된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2-0으로 앞서갔다. 두 득점 모두 레몽 코파의 발끝에서 시작되었다. 코파는 뛰어난 기술과 패스를 바탕으로 레알 마드리드 수비진을 압박했고, 경기는 쉽게 스타드 랭스가 가져갈 것 같았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와 헥토르 리알의 득점에 의해서 승부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렸다. 스타드 랭스가 승부를 앞서가는 역전골을 기록했지만, 마르퀴토스의 동점골과 리알의 역전골이 터지면서 대회는 레알 마드리드의 4-3 승리로 끝났다. 레알 마드리드는 최초의 유로피언 컵 우승 팀이 되었다.

이 경기를 통해서 레몽 코파의 뛰어난 기술력과 경기 운영 능력, 그리고 패스 능력에 반했던 레알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은 코파를 영입하고 싶었다. 그렇게 코파는 38000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4)저승사자 군단에 합류하다

 

1955/1956시즌이 끝나고 스타드 랭스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레몽 코파는 레알 마드리드의 등번호로 7번을 배정 받았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라는 세계 최고의 선수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프란시스코 헨토와 호세 마리아 사라가, 헥토르 리알, 미겔 무뇨스, 호세 산타마리아, 마르퀴토스 등과 같은 뛰어난 스타 플레이어들이 많았다. 이처럼 막강한 레알 마드리드의 전력에 코파까지 합류하게 되면서, 레알 마드리드는 그 유명한 저승사자 군단을 조직하게 되었다. 코파가 합류한 레알 마드리드는 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팀으로 거듭났다.

 

레몽 코파가 레알 마드리드의 전술과 시스템에 적응을 끝내자, 레알 마드리드의 기세는 다시 무서워졌다. 레알 마드리드는 1956/1957시즌 때 라 리가와 유로피언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57/1958시즌 때도 2년 연속 라 리가와 유로피언 컵 우승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에스파냐와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레몽 코파는 이제 유럽이 아닌 전 세계 무대를 제패하는 일만 남았다. 1957/1958시즌이 끝난 후, 코파는 프랑스를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기 위해서 1958년 스웨덴에서 열리는 스웨덴 월드컵 참가를 위해 프랑스 국가대표팀에 합류했다.

 

5)세계 정복에 실패한 프랑스의 축구 황제

 

프랑스 국가대표팀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과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 참가했다. (하지만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프랑스는 조별예선에서 탈락했다) 이 시기의 프랑스를 놓고 프랑스 축구계는 첫 번째 황금 세대라고 표현하는데, 당시 프랑스에는 레몽 코파뿐만 아니라 또 다른 한 명의 엄청난 선수가 있었다. 바로 쥐스트 퐁텐이었다.

 

쥐스트 퐁텐의 존재는 프랑스에게 축복과도 같았다. 특히 퐁텐의 활약을 익히 들어 알았던 레몽 코파는 그와 함께 뛰고 싶어 했었는데, 그 바람이 바로 프랑스 국가 대표 팀에서 이루어졌다. 뛰어난 득점력을 갖춘 폭격기 퐁텐과 경기를 이끌었던 사령관 코파의 합류를 기대했던 프랑스 국민들은, 프랑스가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쥐스트 퐁텐과 레몽 코파를 앞세운 프랑스 국가대표팀은 월드컵에서 질주의 질주를 거듭했다. 프랑스는 파라과이와 스코틀랜드를 격파하며 21패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 북아일랜드를 만난 프랑스는, 4-0으로 가볍게 북아일랜드를 격파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들의 질주를 막을 팀은 그 어느 팀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들의 질주는 4강에서 좌절했다. 바로 혜성 같이 등장했던 브라질의 축구 황제 때문이었다. 이 브라질 선수의 이름은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 여전히 변함없이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로 불리는 축구 황제 펠레였다.

 

4강에서 브라질을 만났던 프랑스 언론은 브라질의 상승세가 쥐스트 퐁텐과 팽토니, 그리고 레몽 코파로 구성된 프랑스 국가 대표 팀에 의해 꺾일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만큼 퐁텐과 코파가 보여주는 활약이 매서웠고, 팽토니 역시 퐁텐과 코파 못잖은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 언론의 그 같은 예측은 브라질의 축구 황제에 의해 빗나가 버렸다.

 

경기는 시작부터 브라질이 프랑스를 압도했다. 브라질은 경기가 시작된지 2분 만에 선제골을 기록했다. 퐁텐이 7분 후 동점골을 기록했지만, 브라질은 39분에 역전골을 넣으며 1-2 리드를 가져갔다. 그리고 펠레는 프랑스를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프랑스는 2-5로 완패했고, 세계 축구를 정복하겠다는 레몽 코파의 야망은 펠레에 의해서 무너졌다.

 

쥐스트 퐁텐은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총 13득점을 기록하며 월드컵 역사상 단일 대회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올렸다. 더 놀라운 것은, 그는 모든 경기에서 득점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또한, 퐁텐과 함께 뛰었던 코파는 이 대회 이후 레알 마드리드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갈지 말지에 대해서 큰 고민에 빠졌다. 퐁텐이 코파가 친정팀인 스타드 랭스로 돌아올 것을 권유했었기 때문이다.

 

6)프랑스로 돌아온 황제, 나폴레옹처럼 추락하다

 

1958년은 레몽 코파에게 여러 가지로 의미가 많았던 해였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를 유로피언컵 우승으로 이끌었고, 프랑스를 스웨덴 월드컵 3위로 이끌었다. 이에 유럽 축구계는 그의 활약을 높이 평가하여 유럽에서 뛰는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로 결심했다. 코파는 1956년 발롱도르가 재정된 지 3년 만에 3번째 발롱도르 수상자가 되었다.

 

1958/1959시즌 유로피언 컵 결승전에서 친정팀을 만난 레몽 코파는, 경기가 끝난 이후 쥐스트 퐁텐과 함께 스타드 랭스에서 뛰기로 결심했다. 친정팀으로 복귀한 코파는, 퐁텐과 함께 프랑스와 유럽 무대 정복을 노렸다.

 

하지만 프랑스와 유럽 무대 동시 정복을 노렸던 레몽 코파와 쥐스트 퐁텐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타드 랭스는 프랑스에서 강했지만, 유로피언 컵에서는 글랜드의 번리와 네덜란드의 페예노르트를 만나며 탈락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퐁텐이 부상으로 만2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하게 되면서, 스타드 랭스의 추락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떨어졌다.

 

스타드 랭스는 1963/1964시즌 때 리그 17위를 차지하며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유로피언컵 8강에 진출하며 유로피언컵 우승을 노렸던 그들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지만 레몽 코파는 팀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1964/1965시즌부터 1965/1966시즌까지 2년간 2부 리그에서 뛰며 팀의 승격을 이끌었고, 스타드 랭스는 강등 된지 2년 만에 1부 리그로 복귀했다.

 

하지만 스타드 랭스는 1부 리그에 복귀한지 1시즌도 체 되지 않아 1966/1967시즌에 리그 19위로 또 다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이것은 레몽 코파가 선수로써 보냈던 마지막 시즌이기도 했었다. 한때 프랑스와 에스파냐, 유럽 무대를 정복하며 나폴레옹이라고 불렸던 코파의 마지막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했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만큼 초라했다.

 

7)마지막으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방문하다

 

프랑스 축구의 황제이자 축구계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렸던 레몽 코파는 축구 선수로 최초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상한 선수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만든 사람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

 

축구 선수에서 은퇴한 레몽 코파는 은퇴 이후 코치나 감독직을 역임하는 선수들과 달리 코치나 감독직을 맡지 않았다. 그는 선수생활에서 은퇴한 이후 프랑스의 코르시카 섬으로 이주했다. 공교롭게도 코르시카 섬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축구계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렸던 코파에게 나폴레옹이라는 존재는 그에게 동경했던 대상이자 넘고 싶은 대상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역시 세계를 정복하지 못했다.

 

201716. 레몽 코파는 마지막으로 선수 시절 자신이 전성기를 누렸던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방문했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크리스티아노 호나우도가 2017년에 발롱도르를 수상했었고, 클럽은 이러한 크리스티아노 호나우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 중 발롱도르를 수상한 경험이 있는 선수들을 초대했다. 3대 발롱도르 수상자였던 코파 역시 이 행사에 참가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참가한 레알 마드리드의 공식 행사였다.

 

그리고 두 달 후인 201732일에, 프랑스와 레알 마드리드의 영웅이었던 레몽 코파는 만8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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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있는데, 레매에 사진 넣는 법이 복잡해서 넣지 않았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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