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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역사와 진화] - 측면 수비수편 1부

정수정 2016.04.19 02:55 조회 4,027 추천 21
안녕하세요


앞으로해도 정수정 거꾸로해도 정수정


레알매니아 정수정 입니다.












이번 볼프스부르크와 챔피언스리그 8강전을 보시고


많은 회원분들께서 풀백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느끼셨을것입니다.


저 또한 축구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포지션은 없다고 깨닳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축구의 포지션의 역사와 진화를 시대별로 분석해


레알매니아 회원분들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비록 처음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우리가 항상 기다리는것



도착했을때 항상 설레고 기대되는것











"택배"









...?







너 말고













과거 축구에서 윙어들의 역할은 단순했습니다.

사진처럼 일명 "택배" 크로스를 올려주거나, 측면공간을 돌파해 나가는것




그리고 그 윙어를 막는것이 바로 측면 수비수였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매우 한정적이었습니다.

팀이 공격할때조차 자리를 지키고,

본업인 수비에 전념하는것....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정관념을 깨는 수비수가 등장했습니다.













1925년


프랜시스 스콧 피스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갯츠비" 가 출간된 해입니다.

1929년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이 오기 전, 미국식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극에 달해

주가는 매일 급등하고, 사람들은 풍요속에 나날이 웃었습니다.






같은 해, 5월 16일

미래 브라질 국민을 행복하게 할 아이가

브라질의 어촌에서 태어납니다.

그 역시 여느 아이들처럼 해변에서 공을차며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 소년은 그렇게 축구선수의 꿈을 키워갔고,

공격수로써 보타포구 FR에 입단합니다.



하지만 그의 수비적 재능을 눈여겨본 감독이 그의 포지션을 바꾸었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훗날 브라질 최고의 레프트백이 되는 "니우통 산토스"입니다.



故 니우통 산토스 (1925 - 2013)



그는 보타포구에서 720경기를 출전한 레전드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역량은 국제대회에서 더 빛났습니다.







1958년 월드컵 대표팀에 승선한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당시 감독이었던 비센치 페올라는 수비적인 역할을 지시했지만,

니우통은 끊임없이 공격을 했고, 월드컵 최초로 수비수 필드골을 기록했습니다.









1958년 브라질은 강했습니다.



니우통 산토스가 버티고 있는 왼쪽 수비 못지않게 오른쪽 수비도 막강했습니다.





故 지우마 산토스 (1929 - 2013)



바로 "지우마 산토스"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공격수였던 주제 아우타피니가 부진하자, 비센치 감독은

공격수에 펠레를, 측면에는 가린샤를, 중앙에는 디디와 지투 넣었고,

측면 수비수들에게 공격을 허락했습니다.





(1958-1962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스쿼드)



결과는 우승이었습니다.



이 기세를 몰아서 펠레, 가린샤와 함께 니우통 산토스와 지우마 산토스는

1962년 월드컵마저 제패하는데 성공합니다.




(브라질, 1962년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리다!)





이렇게 측면 수비수의 페러다임을 바꾼 두 수비수덕분에 브라질은 승승장구합니다.















같은 시대,



유럽에선 로큰롤이 발달하여 주류로 자리잡게되고,

사람들은 비틀즈에 열광했습니다.





(the Beatles)





과학기술도 어마어마한 발전을 하였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우주개발에 열을 올렸고, 결국 아폴로 11호는 달 착륙에 성공합니다.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





당시 서구 사회는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세계 2차대전 이후, 경제성장을 맞이했으며, 음악,과학,예술 모든것이 발달했습니다.





이는 축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전설 "지아친토 파케티" 선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故 지아친토 파케티 (1942 - 2006)



인테르의 원클럽맨이었던 그는

역시 앞선 두 산토스처럼 공격하는 풀백이었습니다.



191cm에 달하는 엄청난 피지컬 능력과 함께

공 수 모든 능력에서 최고였습니다.




엄청난 오버래핑과 함께 인테르는 공수 밸런스를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카테나치오를 완성한 인물이었습니다.





유럽 최초의 공격형 풀백이었던 그는 산드로 마촐라, 루이스 수아레스와 함께

라 그란데 인테르(위대한 인테르)의 일원이었습니다.





(당시 인테르의 스쿼드, 파케티가 오버래핑을 통해 공격을

전개했고, 야일의 수비 가담으로 인해 우측 풀백이 없다)






엘레리오 에레라 감독과 함께

유러피언 컵(챔피언스 리그의 전신) 2연패에 성공하고,

3개의 스쿠데토를 획득합니다.











그가 이끄는 아주리 군단은

1970년 또 다른 천재 풀백이 이끄는 카나리아 군단과 월드컵을 놓고 겨루었습니다.



당시 우승컵인 쥘리메컵은 3번 우승한 국가가 영구로 소장할 수 있었는데,

당시 이탈리아, 브라질 모두 2번의 우승을 차지한 팀이었습니다.



승리의 여신은 브라질의 손을 들어주었고, 쥘리메컵은 브라질이 가져갑니다.







카를로스 아우베르투 (1944 - 현재)





오랜 기간 축구를 접해온 팬들에게 축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팀을 꼽으라면

아마 1970년 브라질 대표팀을 꼽을 것입니다.





펠레, 히벨리누, 자일지뉴, 토스탕, 제르송이 속해있던

당시 카나리아 군단의 캡틴이었던 그는 엄청난 리더십의 소유자였습니다.





엄청난 주력과 킥력을 보유한 그는

1970년 월드컵 결승전, 펠레의 어시스트를 받아 골을 작렬시키며

파케티의 아주리군단을 무려 4:1로 누르며 쥘리메 컵을 가져옵니다.




(1970년 월드컵 결승전, 카를로스 아우베르투의 골)















1974년, 카나리아군단이 가져간 쥘리메컵 대신 새로운 트로피를 놓고

세기의 라이벌이 격돌하였습니다.




(故 요한 크루이프 vs "카이저" 베켄바워)



경기 시작 직후,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 대표팀은

서독을 몰아세웠습니다.



네덜란드가 공격할때 서독 선수들은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고,

요한 크루이프를 막던 중 베르티 포그츠 의 실수로 페널티킥을 헌납합니다.







(1974년 월드컵 결승전 골 모음)



요한 크루이프가 얻어낸 페널티킥을 요한 네스켄스가 성공시키며,

월드컵에 한발짝 더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이 경기를 결국 서독이 뒤집었고, 결과는 2:1 , 서독의 승리였습니다.

프란츠 베켄바워의 지휘 하에 서독 선수들이 흐름을 쥐었지만,

이 경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 사람이었습니다.




베르티 포그츠 (1946 - 현재)



바로 첫번째 실점의 빌미가 된 페널티킥을 내준 "베르티 포그츠" 였습니다.



묀헨 글라드바흐 원클럽맨이기도 했던 그는

사실 테크닉이 정말 부족했습니다.

리프팅을 세번밖에 하지 못하지만 끈질긴 맨마킹으로 상대 공격수를 봉쇄했고,

엄청난 수비력 못지않게 오버래핑에도 나서서 공격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엄청난 수비 덕에 결승전에서 요한 크루이프를 봉쇄하였고,

요한 크루이프가 지워진 네덜란드는 프란츠 베켄바워한테 집어삼켜졌습니다.





(1974년 월드컵 결승전 당시 양팀의 스쿼드)





그는 엄청난 수비력으로 1971년, 1979년 독일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었으며,

빌트지 월드 클래스를 7번이나 따 내었습니다.









1979년 베르티 포그츠가 은퇴한 해, 인테르에서 어린 선수가 데뷔합니다.




주세페 베르고미 (1963 - 현재)



바로 그 유명한 프랑코 바레시의 라이벌 "주세페 베르고미" 였습니다.





그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만 20세도 안된 나이로 출전하였습니다.




세레조, 팔카오, 지쿠 ,소크라테스 황금의 4중주 브라질을 상대로

교체출전한 그는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엄청난 수비력으로

파올로 로시의 헤트트릭과 함께 팀의 승리에 기여했습니다.




이어 4강전과 결승전에도 선발로 나서게 되고,

당시 서독의 칼-하인츠-루메니게를 완벽하게 봉쇄해내며,

서독을 상대로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3:1 승리를 일궈냅니다.





이 경기에서 그 유명한 타르델리의 포효 세레머니가 탄생합니다.




(마르코 타르델리의 골 셀레브레이션, 이곳은 베르나베우!)




비록 사람들의 기억속의 주인공은 타르델리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리베로 가에타노 시레아와 그 옆에 오른쪽을 든든히 지켜주던

당대 최고의 파이터형 라이트백 주세페 베르고미가 없었다면

이탈리아는 가슴에 세번째 별을 추가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시레아와 카브리니의 뒤를 이어 아주리 군단의 주장이 된 베르고미는

1988년 유로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프랑코 바레시와 호흡을 맞추며 8강까지 승승장구하였습니다.




4강전 상대는 소련, 그러나 해체 전의 소련은 강했습니다.

엄청난 혈투를 벌였지만 결국 아주리 군단은 4강에서 패배합니다.




(유로 1988 소련vs이탈리아, 주세페 베르고미)













그러나 이 패배는 훗날 전설이 되는 누군가에겐 또다른 시작이었을 것입니다.



1988년 20세의 나이로 갓 국가대표에 승선한 누군가에게는......













2부에 계속...







 






참고 자료

풀백 https://namu.wiki/w/%ED%92%80%EB%B0%B1

니우통 산토스 https://namu.wiki/w/%EB%8B%88%EC%9A%B0%ED%86%B5%20%EC%82%B0%ED%86%A0%EC%8A%A4

지아친토 파케티 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C%B9%9C%ED%86%A0_%ED%8C%8C%EC%BC%80%ED%8B%B0

https://namu.wiki/w/%EC%A7%80%EC%95%84%EC%B9%9C%ED%86%A0%20%ED%8C%8C%EC%BC%80%ED%8B%B0

카를로스 아우베르투 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B%A5%BC%EB%A3%A8%EC%8A%A4_%EC%95%84%EC%9A%B0%EB%B2%A0%EB%A5%B4%ED%88%AC_%ED%86%A0%ED%97%A4%EC%8A%A4

베르티 포그츠 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B%A5%BC%EB%A3%A8%EC%8A%A4_%EC%95%84%EC%9A%B0%EB%B2%A0%EB%A5%B4%ED%88%AC_%ED%86%A0%ED%97%A4%EC%8A%A4

https://ko.wikipedia.org/wiki/%EB%B2%A0%EB%A5%B4%ED%8B%B0_%ED%8F%AC%ED%81%AC%EC%B8%A0

주세페 베르고미 https://namu.wiki/w/%EC%A3%BC%EC%84%B8%ED%8E%98%20%EB%B2%A0%EB%A5%B4%EA%B3%A0%EB%AF%B8

https://ko.wikipedia.org/wiki/%EC%A3%BC%EC%84%B8%ED%8E%98_%EB%B2%A0%EB%A5%B4%EA%B3%A0%EB%AF%B8

카테나치오 https://namu.wiki/w/%EC%B9%B4%ED%85%8C%EB%82%98%EC%B9%98%EC%98%A4

그란데 인테르 https://ko.wikipedia.org/wiki/FC_%EC%9D%B8%ED%85%8C%EB%A5%B4%EB%82%98%EC%B9%98%EC%98%A4%EB%82%A0%EB%A0%88_%EB%B0%80%EB%9D%BC%EB%85%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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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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