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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레] 2. 오프사이드, 허버트 채프먼, W-M 전술

알렉산드레 2016.04.03 19:28 조회 1,630 추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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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레] 1. 현대 축구의 시작, 그리고 피라미드 전술  http://realmania.net/bbs/zboard.php?id=openbbs&page=7&sn1=&divpage=13&sn=off&ss=on&sc=off&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0786





Jonathan Wilson -
Inverting the Pyramid: The History of Football Tactics: A History of Football Tactics






1925년,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경기당 2.58이라는 당시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낮은 평균득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축구는 지루해졌고, 관중 수는 떨어졌다. 뉴캐슬과 노츠 카운티를 필두로 몇몇 클럽들이 이런 재미없는 축구를 없애려면 오프사이드 규칙을 완화해야한다며 발 벗고 나섰다.


시의 오프사이드 규칙은 1866년 이후로 바뀌지 않은 상태였다. 즉, 골키퍼와 2명의 수비수를 포함해 총 3명의 상대편 선수가 자신과 골대 사이에 있어야 했다. FA는 두 가지의 해결방안을 들고 나왔다. 하나는 공격수 앞의 수비 숫자를 둘로 줄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골대에서 18미터 지점에 선을 추가해서 그 뒤에서는 오프사이드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반전은 전자의 안으로, 후반전은 후자의 안으로 시범경기를 여러 차례 진행한 결과, FA는 전자의 안이 더 낫다고 결정하였다. 곧이어 국제이사회에 제출된 오프사이드 규칙은 1925-26 시즌부터 바로 시행되었다.






실, 바뀌기 전의 오프사이드 규칙은 조금만 연구를 해보면, 저조한 득점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많은 팀들은 오프사이드 트랩을 능숙하게 사용하였는데, 한 명의 수비수가 오프사이드 트랩을 위해 앞으로 나갔다 트랩에 실패하여도 남아있는 다른 한명의 수비수가 커버 플레이를 하면 그만이었다. 많은 팀들이 안정된 수비가 가능했다. 하지만 변
경된 오프사이드 규칙은 한 번 판단을 잘못하면 곧바로 골키퍼와의 일대일 찬스를 내주는 꼴이 되었다.


음 시즌 경기당 평균 득점이 3.69로 치솟으며 수정안은 성공을 거뒀다. 오프사이드 규칙의 변화로 공격수는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더 확보하였고, 넓은 공간에서 플레이 할 수 있었다. 짧은 패스 대신에 롱 볼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몇 몇 팀들은 바뀐 경기방식에 적응하지 못하며 일관된 경기력을 유지하지 못했다.


이어 허버트 채프먼은 세 번째 수비수를 두는 변화를 주었고, 이것은 영국 축구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아스날의 전설적인 감독이 감행한 전술의 변화 때문에 영국 축구가 쇠퇴하고 부정적인 면들이 두드러졌다라고 주장한다.







버트 채프먼의 감독으로서의 출발은 그리 화려하지 못했다. 채프먼은 1907년 노스샘프턴의 총 감독직에 오르며 감독 커리어의 시작을 알렸다. 이 당시의 축구인들 중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은 그랬듯, 스코틀랜드의 패스 축구와 그런 축구에 녹아 있는 기교와 노련함을 좋아했다. 그는 그것들은 팀으로 녹여내려고 시도 했지만, 시즌 초반 부진에 빠졌다. 이에 채프먼은 선수들에게 뒤로 쳐질 것을 주문했다. 그가 노리는 것은 상대 수비수들은 빠져 나오게 하여 팀이 공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전술적 변화로 노스샘프턴은 남부 리그 타이틀을 차지했다.


1912년, 채프먼은 리즈 시티로 옮겼다. 2부리그 꼴찌였던 팀을 4위까지 끌어 올리지만, 클럽이 불법적인 돈 거래를 했다는 의혹에 리즈 시티는 리그에서 추방당했고, 클럽의 회계장부를 넘기기를 거부한 채프먼은 축구계에서 영구제명 당했다. 물론 제 1차 세계대전이 축구계에 몰고 온 여파도 무시 할 수 없지만, 채프먼은 감독 커리어의 최대 위기를 맞는다.


1921년, 모든 것을 잃고 오일과 케이크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하던 채프먼은 허더즈 필드 타운으로부터 총 감독 앰브로즈 랭글리의 보좌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축구계로 돌아올 준비를 한 채프먼은 FA에 리즈 시티의 불법적인 돈 거래가 있던 시기에 본인은 클럽과 전혀 관계가 없었던 위치에 있었으며, 전혀 관련이 없다는 점을 어필했고, FA가 너그러이 수용하면서 채프먼은 직책을 맡게 되었다. 곧 이어 랭글리가 술집을 경영하겠다며, 총 감독직을 내려놓자 채프먼이 그 자리에 올랐다.








프먼은 총 감독직에 오르자마자, 필드에서 팀을 이끌 리더의 부재를 외쳤다. 곧 이어 허더즈 필드는 32세의 클렙 스티븐슨을 영입하는데, 스티븐슨은 채프먼의 신봉자였고, 역습 전술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그는 중앙선에 있다 앞으로 치고 나가면서 오프사이드 트랩을 부수는 역할에 아주 능숙했다. 경기력을 빠르게 향상되었고, 관중 수는 빠르게 늘어났다. 마침내 1922년, 프레스턴 노스 엔드를 물리치고 FA컵 우승을 차지하지만, FA의 반응은 냉랭했다. FA는 결승전을 두고 "형편없는 경기."라고 평했고, 이어 "앞으로는 어떤 결승전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기가 펼쳐지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채프먼은 이 경기에서 센터 하프 톰 윌슨을 평소보다 깊게 배치 시켜서 상대 공격을 방해 했는데, FA는 이런 플레이를 꼼수를 부리는 것, 정석과 벗어난 부정한 방법이라 인식했다.


FA의 혹평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채프먼은 명확한 축구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필드에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채프먼은 최초의 현대적 의미의 감독이었다. 계약 채결, 전술 선택은 물론이고, 관중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하프타임에 축음기 레코드를 트는 준비까지 하곤 했다. 그야말로 클럽 운영을 완벽히 장악했다.


듬해 허더즈 필드가 3연패를 달성했을 때, 채프먼은 이미 잠재력이 더 많다고 판단한 아스날로 떠난 후였다. 하지만 채프먼의 판단과 다르게 아스날은 헨리 노리스라는 권위적인 회장 아래에서 힘겨워 하고 있었다. 노리스는 채프먼의 전임 감독이던 레슬리 나이턴을 여러 가지 부당한 이유를 들며 해고 했었다. 채프먼은 노리스에게 무언가 달성하려면 5년은 필요하다고 했고, 부당한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아스날의 총 감독직에 부임했다.








가 처음으로 영입한 선수인 찰리 버칸은 영입되자마자 오프사이드 규칙의 변화에 따라서 센터하프의 수비적 역할을 강조했다. 이렇게 해야만 상대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 빌드업 과정을 방해함으로써 볼 소유와 공간을 지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채프먼은 오랜 고심 끝에 이 제안에 수긍했다. "지속 가능한 공격" 그리고 역습을 추구했던 채프먼이 왜 이런 제안을 진작 수용하지 않았나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채프먼은 그의 영구제명 상태를 풀어준 FA가 1922년 FA컵 우승 당시 했던 혹평을 계속해서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터하프가 3번째 수비수가 되자 미드필더가 부족해졌고, 오른쪽 공격수가 그 공백을 메꾸며 일시적으로 3-3-4 포메이션이 되었다. 센터하프는 강한 압박과 시끄러운 아유에도 흔들림 없이 역할을 수행 할 수 있는 인내심과 침착함 그리고 넓은 시야로 수비의 기둥이 되어야했다. 아스날의 성공으로 인해 그들의 스타일을 따라할 수 없는 선수가 없음에도 다른 클럽들은 아스날을 흉내 냈다.


1927년, FA컵 우승을 카디프에게 내주었지만, 협회의 변칙재정 문제 조사 후, 권위적인 노리스 구단주는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아스날의 성공시대가 열렸다. 채프먼의 첫 영입선수였던 찰리 버칸이 1928년 은퇴했지만, 왜소한 체격의 스콧 알렉스 제임스는 채프먼의 시스템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프먼은 그가 약속한대로 그의 다섯 번째 시즌에 아스날은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 시즌을 거치면서 채프먼의 아스날은 새로운 전형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풀백은 좌우 공격수보다 윙어를 방어했고, 윙 하프는 윙어자리보다 상대 좌우 공격수 자리를 지키고, 지금의 센터백인 센터하프가 상대 중앙 공격수를 저지했으며, 좌우 공격수는 더 아래로 내려왔다. 2-3-5가 3-2-2-3이 되면서 W-M 포메이션이 탄생했다.


공과 더불어 아스날은 현대화되었다. 하이버리 구장에 시계가 설치되고, 하이버리 근처의 지하철역 명칭을 아스날로 변경했다. 또, 흰색 소매를 붉은 유니폼 상의에 덧 붙였는데, 흰색이 어떤 색깔보다 시야에 잘 들어온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금요일 훈련이 끝나면 채프먼이 자석 작전판 주위에 선수들을 모아놓고 다가올 게임에 대한 논의를 하게 한 점은 후세에 체계적인 승리를 만들어가는 최초의 매니저라는 평을 받기에 충분한 변화였다.


프먼의 시스템은 진가를 발휘했다. 아스날은 1931년, 1933년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32년에는 컵 대회 준우승을 차지하는데 이른다. "기계와 가까워지고 있는 팀"이라는 평가는 당대에 있어서 축구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극찬이었다.


<데일리 메일>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 단 하나의 아스날이 있다. 다른 아스날은 상상할 수는 없다. 이유는 단 하나, 다른 클럽에는 아스날의 철학을 수행 할 만한 선수들이 없기 때문이다.








<데일리 메일>의 논평처럼 아스날의 철학을 수행할 만한 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클럽 대항전에선 W-M 시스템을 완벽하게 수행 할 수 없었다. 대표적인 문제는, 센터하프였다. 채프먼의 전술에서 센터하프는 공격적인 임무도 맡았다. 하지만 공격을 잘하는 센터하프보다 수비를 잘하는 센터하프가 되는 것이 더 쉬웠다. 채프먼 등식의 창 적인 임무를 완수하는 일은 훨씬 어려웠다. 알렉스 제임스의 능력을 가진 중앙 공격수는 드물었고, 뭐든지 길게 걷어내던 허비 로버츠 스타일의 스토퍼는 풍부했다.


코틀랜드식 축구의 진정한 스승이라 불리는 지미 호건은 "다른 클럽들이 채프먼을 따라하려 했지만, 그런 선수들이 없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 결과 잉글랜드 축구가 몰락했다. 즉, 수비를 강조하고 적극적인 경기 운영을 중단하려는 듯 공을 내지르는 일이 발생했다. 이런 형태의 경기를 하다 보니 볼 터치와 공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었다.


격 작업에 있어서 창조의 고통을 견디기보다 대충 공격수가 있는 방향으로 롱 볼을 차 내기가 훨씬 쉬웠던 탓에 잉글랜드 축구는 몰락했다. 롱 볼 축구와 잉글랜드 축구는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상적인 축구에 대한 고민은 잉글랜드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잉글랜드에서 축구는 하나부터 열까지 이기는 문제로 바뀌었다. 축구의 종주국임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래도 우리가 누군가"하는 축구에 대한 우월성이 있었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전술적으로 퇴보했다. 패배와 승점을 잃는 두려움이 그들의 자신감과 열정을 좀 먹었고, 어떻게 하면 이길까 고심하던 사람들이 꺼내든 부정적인 전술이 그들을 퇴보하게 만들었다. 잉글랜드 축구는 분명 우월했다. 하지만 그들의 보수성과 근시안적인 사고들로 인해 철저히 재능을 소진하고 희생당했다. 좋은 축구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를 쥐어짜고 기뻐 날 뛰던 순수의 시대는 잉글랜드에서 그렇게 저물었다.




알렉산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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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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