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레] 1. 현대 축구의 시작, 그리고 피라미드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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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레] 1. 현대 축구의 시작, 그리고 피라미드 전술

Jonathan Wilson -
Inverting the Pyramid: The History of Football Tactics: A History of Football Tactics
축구의 시작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19세기에나 겨우 모양을 갖추었고, 오늘날의 전술과 흡사한 것을 인식하고 그에 대해 토론한 것은 1920년대 후반의 일이다. 그 전에도 필드에 선수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따라 경기의 흐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세련된 전술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직도 실존하는 영국의 군중축구>
중국, 이집트, 로마, 그리스, 그리고 카리브 연안국까지 축구의 발생지를 주장하지만, 현대의 축구는 영국의 군중놀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게임의 원리는 간단하다. 두 팀으로 나뉘어 공처럼 생긴 것을 경기장이라 정해놓은 곳의 반대편 끝 목표물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하지만 명확한 규칙이 없으니 게임을 폭력적으로 흐르기 십상이었고, 금지령을 내리는 곳이 많았다. 19세기 초, 신앙과 동시에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삶을 지향하는 것을 장려하는 사립학교의 교육 아래, 사람들은 스포츠를 통해서 도덕심을 키울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제서야 지금과 비슷한 축구가 등장했다.

<웨스터민스트 수도원>
축구의 인기는 19세기 전반 내내 식을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규칙은 당시 학교의 환경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진흙밭에서 경기가 벌어지던 첼트넘지역에서는 한 선수가 넘어지면, 뒤 따르던 선수들이 그 위에 넘어지곤 했다. 웨스터민스트 지역에서는 수도원 마당에서 경기가 벌어졌는데 진흙밭처럼 당연히 거칠게 하지 못했다. 대신 드리블 기술이 생겨났다. 초기의 영국축구는 사실상 드리블이 전부였고, 패스나 협력, 방어를 열등한 것으로 여겼다.

보급된 규칙이 없자, 축구를 정착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848년 영국의 해리 찰스 몰든은 여러 대학의 학생들과 함께 "케임브리지 규칙"이라는 최초의 통합 축구 규칙을 만들었다. 규칙은 사람들에게 잘 전도되었고, 흡족할만한 효과가 있었다. 그로부터 14년 뒤 남부지역에서 새로운 규칙이 생겨났고, 이듬해 10월 "케임브리지 대학 축구 규칙"이 출간되았다. 그로부터 한달 뒤 결정적으로 축구 협회(FA)가 만들어졌다. 협회는 확정적인 규칙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였지만, 여전히 손과 발을 둘다 사용하는 것에 머물렀다. 하지만, 1863년 런던의 한 프리메이슨 선술집에서 가졌던 다섯번째 모임에서 손으로 공을 들고 가는 것을 금지하면서 축구와 럭비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논쟁은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정강이를 걷어 차는 것. 즉 해킹(hacking)을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해킹을 찬성했던 블랙히스의 공격수 프란시스 마누엘 켐밸은 "해킹을 없앴다면 게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용맹스러움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의 말로 당시 축구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알 수 있는데, 영국 사람들에게 축구는 여전히 남성미의 절정이었다. 해킹이 금지되자 결국 블랙히스는 FA를 탈퇴했다.
패스보다 드리블이 대세였던 이유는 FA의 제 6조항 탓이었다. 제 6조항은 "한 선수가 킥을 했을 때 상대 골라인 쪽에 더 가까이 있는 같은 편 선수는 그 상황이 종료될 때 까지는 플레이에 관여하거나 공을 건드릴 수 없다."라는 내용이었는데, 즉, 패스를 옆이나 뒤로 해야했다. 공을 가진 선수는 골대로 직접 돌진해야만 했고, 영국인에게 전진패스는 애초에 남자답지 못하고 여길뿐더러 규칙적으로 금지되있는 내용이었다.
제 6조항은 1866년에 바뀌어서 "반대쪽 골대와 우리편 선수 사이에 골키퍼를 포함하여 최소 세 명의; 수비수가 있으면 전진패스가 가능하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오프사이드 규칙보다 한 명이 더 많았는데 드리블에 길들여진 영국인들에게 규칙의 변화는 새로운 바람을 불어오지 못했다.

<1872, England v Scotland>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의 미래는 패스였다. 패스가 널리 퍼지게 된 최초의 경기는 최초의 국제경기이기도 했던 1872년, 글래스고 햄든 파크에서 열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기였다. 잉글랜드는 한쪽으로 치우진 1-2-7에 가까운 포메이션이었다. 스코틀랜드는 2-2-6이었는데 당시의 스코틀랜드 선수들은 잉글랜드 선수들보다 평균 체중이 약 6kg이 덜 나갔다. 당시의 축구 이론가들은 체력과 몸싸움에 바탕을 둔 초기 축구의 특성답게 체중에 우위가 있는 잉글랜드의 낙승을 점쳤다. 물론 잉글랜드는 몸집뿐만 아니라 오랜시간 다져온 전통과 높은 선수 수급 능력이 있었지만 예상외로 스코틀랜드와 득점없이 비겼다. 이 경기 결과로 잉글랜드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을 뿐이지만, 스코틀랜드에선 패스가 드리블보다 낫다는 확신을 불어왔다.
사실 스코틀랜드에선 축구는 태초부터 패스로 시작했다. 잉글랜드와의 경기에 스코틀랜드 대표로 출전했던 퀸즈파크는 1867년 창단 시, 그들이 채택한 오프사이드 규정에 따르면 "골라인에서 두번째 사람보다 앞에 있고 동시에 필드 끝에서 약 13미터 안에 있을 때만 오프사이를 적용한다"고 했다. 이 규정은 당시 FA의 규정보다 훨씬 더 패스를 유도하는 규정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선 공은 킥을 위해 존재했다.


<퀸즈파크와 2-3-5>
퀸즈파크는 두 번에 걸친 최초의 국제경기를 위해 스코틀랜드 대표팀을 이끌어나갔고, 스코틀랜드 축구의 기반을 잡는데 큰 목소리를 냈다. 패스게임은 계속해서 성공해나갔고, 남쪽으로 퍼져나갔다. 패스는 축구의 미래였다. 마침내 1880년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의 국제경기에서 선보였던 2-2-6 포메이션에서 중앙의 센터 포워드 2명 중 한명이 내려와 2-3-5 포메이션의 센터하프가 되었다. 이것이 피라미드 전술인데, 2-3-5 포메이션은 영국 전역에서 유행했다. 센터하프는 공격과 수비 모두를 담당하는 전천후 선수였다.

<프레스턴 노스 엔드>
2-3-5 전술이 뛰어나다는 것은 1880년대 프레스턴 노스 앤드의 성공으로 확인되었다. 프레스턴 노스 엔드는 1887-88 시즌 무패 우승을 포함해서 최초로 리그와 FA컵을 우승하며 더블을 차지했다. 1925년 오프사이드 규칙이 변경되어서 아스날의 전설적인 감독 허버트 채프먼이 W-M 포메이션이 개발될 때까지 피라미드 전술은 거의 모든 곳에서 당연시 여겨지는 전술이었다. 드리블과 전진하는 것이 한때는 유일한 올바른 방법으로 통했듯이 2-3-5 전술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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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레] 1. 현대 축구의 시작, 그리고 피라미드 전술

Jonathan Wilson -
Inverting the Pyramid: The History of Football Tactics: A History of Football Tactics
축구의 시작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19세기에나 겨우 모양을 갖추었고, 오늘날의 전술과 흡사한 것을 인식하고 그에 대해 토론한 것은 1920년대 후반의 일이다. 그 전에도 필드에 선수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따라 경기의 흐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세련된 전술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직도 실존하는 영국의 군중축구>
중국, 이집트, 로마, 그리스, 그리고 카리브 연안국까지 축구의 발생지를 주장하지만, 현대의 축구는 영국의 군중놀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게임의 원리는 간단하다. 두 팀으로 나뉘어 공처럼 생긴 것을 경기장이라 정해놓은 곳의 반대편 끝 목표물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하지만 명확한 규칙이 없으니 게임을 폭력적으로 흐르기 십상이었고, 금지령을 내리는 곳이 많았다. 19세기 초, 신앙과 동시에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삶을 지향하는 것을 장려하는 사립학교의 교육 아래, 사람들은 스포츠를 통해서 도덕심을 키울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제서야 지금과 비슷한 축구가 등장했다.

<웨스터민스트 수도원>
축구의 인기는 19세기 전반 내내 식을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규칙은 당시 학교의 환경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진흙밭에서 경기가 벌어지던 첼트넘지역에서는 한 선수가 넘어지면, 뒤 따르던 선수들이 그 위에 넘어지곤 했다. 웨스터민스트 지역에서는 수도원 마당에서 경기가 벌어졌는데 진흙밭처럼 당연히 거칠게 하지 못했다. 대신 드리블 기술이 생겨났다. 초기의 영국축구는 사실상 드리블이 전부였고, 패스나 협력, 방어를 열등한 것으로 여겼다.

보급된 규칙이 없자, 축구를 정착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848년 영국의 해리 찰스 몰든은 여러 대학의 학생들과 함께 "케임브리지 규칙"이라는 최초의 통합 축구 규칙을 만들었다. 규칙은 사람들에게 잘 전도되었고, 흡족할만한 효과가 있었다. 그로부터 14년 뒤 남부지역에서 새로운 규칙이 생겨났고, 이듬해 10월 "케임브리지 대학 축구 규칙"이 출간되았다. 그로부터 한달 뒤 결정적으로 축구 협회(FA)가 만들어졌다. 협회는 확정적인 규칙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였지만, 여전히 손과 발을 둘다 사용하는 것에 머물렀다. 하지만, 1863년 런던의 한 프리메이슨 선술집에서 가졌던 다섯번째 모임에서 손으로 공을 들고 가는 것을 금지하면서 축구와 럭비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논쟁은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정강이를 걷어 차는 것. 즉 해킹(hacking)을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해킹을 찬성했던 블랙히스의 공격수 프란시스 마누엘 켐밸은 "해킹을 없앴다면 게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용맹스러움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의 말로 당시 축구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알 수 있는데, 영국 사람들에게 축구는 여전히 남성미의 절정이었다. 해킹이 금지되자 결국 블랙히스는 FA를 탈퇴했다.
패스보다 드리블이 대세였던 이유는 FA의 제 6조항 탓이었다. 제 6조항은 "한 선수가 킥을 했을 때 상대 골라인 쪽에 더 가까이 있는 같은 편 선수는 그 상황이 종료될 때 까지는 플레이에 관여하거나 공을 건드릴 수 없다."라는 내용이었는데, 즉, 패스를 옆이나 뒤로 해야했다. 공을 가진 선수는 골대로 직접 돌진해야만 했고, 영국인에게 전진패스는 애초에 남자답지 못하고 여길뿐더러 규칙적으로 금지되있는 내용이었다.
제 6조항은 1866년에 바뀌어서 "반대쪽 골대와 우리편 선수 사이에 골키퍼를 포함하여 최소 세 명의; 수비수가 있으면 전진패스가 가능하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오프사이드 규칙보다 한 명이 더 많았는데 드리블에 길들여진 영국인들에게 규칙의 변화는 새로운 바람을 불어오지 못했다.

<1872, England v Scotland>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의 미래는 패스였다. 패스가 널리 퍼지게 된 최초의 경기는 최초의 국제경기이기도 했던 1872년, 글래스고 햄든 파크에서 열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기였다. 잉글랜드는 한쪽으로 치우진 1-2-7에 가까운 포메이션이었다. 스코틀랜드는 2-2-6이었는데 당시의 스코틀랜드 선수들은 잉글랜드 선수들보다 평균 체중이 약 6kg이 덜 나갔다. 당시의 축구 이론가들은 체력과 몸싸움에 바탕을 둔 초기 축구의 특성답게 체중에 우위가 있는 잉글랜드의 낙승을 점쳤다. 물론 잉글랜드는 몸집뿐만 아니라 오랜시간 다져온 전통과 높은 선수 수급 능력이 있었지만 예상외로 스코틀랜드와 득점없이 비겼다. 이 경기 결과로 잉글랜드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을 뿐이지만, 스코틀랜드에선 패스가 드리블보다 낫다는 확신을 불어왔다.
사실 스코틀랜드에선 축구는 태초부터 패스로 시작했다. 잉글랜드와의 경기에 스코틀랜드 대표로 출전했던 퀸즈파크는 1867년 창단 시, 그들이 채택한 오프사이드 규정에 따르면 "골라인에서 두번째 사람보다 앞에 있고 동시에 필드 끝에서 약 13미터 안에 있을 때만 오프사이를 적용한다"고 했다. 이 규정은 당시 FA의 규정보다 훨씬 더 패스를 유도하는 규정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선 공은 킥을 위해 존재했다.


<퀸즈파크와 2-3-5>
퀸즈파크는 두 번에 걸친 최초의 국제경기를 위해 스코틀랜드 대표팀을 이끌어나갔고, 스코틀랜드 축구의 기반을 잡는데 큰 목소리를 냈다. 패스게임은 계속해서 성공해나갔고, 남쪽으로 퍼져나갔다. 패스는 축구의 미래였다. 마침내 1880년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의 국제경기에서 선보였던 2-2-6 포메이션에서 중앙의 센터 포워드 2명 중 한명이 내려와 2-3-5 포메이션의 센터하프가 되었다. 이것이 피라미드 전술인데, 2-3-5 포메이션은 영국 전역에서 유행했다. 센터하프는 공격과 수비 모두를 담당하는 전천후 선수였다.

<프레스턴 노스 엔드>
2-3-5 전술이 뛰어나다는 것은 1880년대 프레스턴 노스 앤드의 성공으로 확인되었다. 프레스턴 노스 엔드는 1887-88 시즌 무패 우승을 포함해서 최초로 리그와 FA컵을 우승하며 더블을 차지했다. 1925년 오프사이드 규칙이 변경되어서 아스날의 전설적인 감독 허버트 채프먼이 W-M 포메이션이 개발될 때까지 피라미드 전술은 거의 모든 곳에서 당연시 여겨지는 전술이었다. 드리블과 전진하는 것이 한때는 유일한 올바른 방법으로 통했듯이 2-3-5 전술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레
댓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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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멜로우 2016.04.01좋은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레매스테이션에 응모하시고 주기적으로 글쓰시는게 어떠실런지?..
추천합니다! -
subdirectory_arrow_right 알렉산드레 2016.04.01@마시멜로우 네, 지원하고 싶은데 어디서 하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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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directory_arrow_right 마시멜로우 2016.04.01@알렉산드레 운영자분들께 쪽지보내시거나 레매스테이션 공지글에 댓글다시면 되는걸로 알고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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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돌 2016.04.01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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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directory_arrow_right 알렉산드레 2016.04.01@에돌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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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자이 2016.04.01와씨 이런 글 넘나 좋아요
지속적인 연재 부탁드립니다
이런 분들이 많아야 진정한 축구커뮤니티라 생각해요 -
subdirectory_arrow_right 알렉산드레 2016.04.01@야누자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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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re 2016.04.01오오 정말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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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directory_arrow_right 알렉산드레 2016.04.01@Sincere 재밌게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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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책 2016.04.01색다른 재미내요!
재밌게 읽고갑니다 추천꾹! -
subdirectory_arrow_right 알렉산드레 2016.04.01@노란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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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amer 2016.04.01축구 전술사는 언제 읽어도 재밌습니다 ㅋㅋ
추천 한방이요 -
subdirectory_arrow_right 알렉산드레 2016.04.01@Kramer 2편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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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kaToni 2016.04.01흐압 이런거 넘 좋다... 진짜 닥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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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directory_arrow_right 알렉산드레 2016.04.01@LukaToni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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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주먹Ace 2016.04.01축구역사이야기 재밌네요 ㅎㅎ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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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directory_arrow_right 알렉산드레 2016.04.01@불주먹Ace 재밌게 읽으셨나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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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i Stielike 2016.04.01저 책 원서 한글번역본 둘다 갖고 있는데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네요 ㅠㅠ 좋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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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directory_arrow_right 알렉산드레 2016.04.01@Uli Stielike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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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2016.04.02완전 재밌네요 ㅋㅋㅋ 2편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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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directory_arrow_right 알렉산드레 2016.04.02@숲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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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온ㅇㅅㅇ 2016.04.02글 올라올 때마다 필독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당 -
Raul 2016.04.03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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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울라구 2016.04.13잘보고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