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와 레알 마드리드: 디 스테파노의 이적 外
많은 축구 팬들에게 레알 마드리드는 독재자의 앞잡이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레알 마드리드의 아홉 번에 걸친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서른두 번에 걸친 라 리가 우승이 근대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식이다. 이중 여섯 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열네 번의 라 리가 우승이 프랑코의 독재 치하 중 이루어졌으니, 결과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레알 마드리드는 “프랑코의 팀”이 아니었다.
이 글에서는 그 허와 실에 대해 알아본다.
라 리가에서의 프랑코
프랑코의 레알 마드리드 지지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럴 법한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다. 1935년 바르셀로나의 회장이었던 조셉 수뇰이 프랑코군에 의해 살해당했던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고, 군부의 경찰이 바르셀로나의 선수들을 협박,
레알 마드리드의
11-1 승리를 만들어낸 것 역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이다.
FC 바르셀로나라는 이름이 축구 클럽의 이름을 카탈란으로 쓰지 못하게 한 정책에 따라 바르셀로나 CF가 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상관 관계가 반드시 인과 관계는 아니듯이, 이러한 근거들이 반드시 레알 마드리드에 대한 프랑코의 편애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조셉 수뇰은 단순한 축구계 인사가 아니었다. 1923년부터 1930년까지 이어졌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집권 당시,
조셉 수뇰은 프리모 데 리베라에 맞서는 좌익 신문사 ‘라 람블라’를 창간했다. 또한 좌익 진영이었던 ‘악씨오 카탈라나’ 및 여러 좌익 단체의 회원이기도 했다.
카탈루냐 축구 협회와 바르셀로나의 회장직을 수임하기는 했지만, 축구계 인물이라기보다는 정계 인물이었던 셈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1936년, 내전 초기 당시 프랑코군에 의해 살해당하기는 했지만, 이는 축구보다는 정치적 갈등에 의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
무엇보다 프랑코의 국가주의자 (nationalist) 당이 내전에서 승리, 집권을 시작한 것은 1938년이 되어서였다.
게다가 프랑코에 저항하다 복역 도중 사망했던 산체스 게라나 프랑코의 공적으로 알려져 있던 안토니오 오르테가 등,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 것은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군부 경찰의 경기 개입 역시 마찬가지다. 알려진 것으로는 앞서 말한 레알 마드리드의 11-1 승리가 유일했으며,
그마저도 경기 직후 진상 규명에 들어갔다. 프랑코가 임명했던 당시 바르셀로나의 회장 피녜이로는 이에 분개,
회장직을 사임하기도 했고, 스페인 축구 협회는 이 경기 결과를 공식적으로 취소했다.
심지어 그렇게 국왕컵 결승에 오른 레알 마드리드는, 반 마드리드 감정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아틀레틱 빌바오에게 패배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때 프랑코의 개입이 있었는지조차 확실하지않았다.
클럽 이름에 카탈란을 쓰지 못하게 된 역시 프랑코의 바르셀로나 핍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당시 카탈루냐가 공화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이루어진 공화당 (Republican)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프랑코의 국가주의당과 척을 진 것은 사실이지만,
안티카탈라니시모 (반 카탈루냐 혹은 반 카탈루냐 독립 감정)는 그 전부터 팽배해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미겔 프리모 데 라 리베라 역시 카탈란 및 바스크의 사용을 엄격히 금지했는데,
이는 정치적 보복이라기보다는 당시 너무나도 심하게 유행했던 지역주의를 제한하는 방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레알 마드리드의 기록이 프랑코의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앞서 말했듯,
레알 마드리드는 서른두 번의 리그 우승 중 열네 번을 프랑코 독재 42년 동안 이루어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프랑코의 비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프랑코의 독재가 시작되기 전부터 마드리드는
8년 동안
2개의 라 리가 타이틀을 획득했을 정도로 강팀이었으며, 프랑코 사후에는 현재까지
39년 동안
16개의 리그 타이틀을 획득했다. 누군가 독재자의 비호를 받았다면 독재자 사후에는 으레 폼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레알 마드리드는 되려 더욱 화려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의 기록이 좋아진 것 역시 프랑코 독재가 시작된 직후가 아니다.
프랑코 독재 이후 레알 마드리드가 첫 리가 우승을 했던 것은 1953년, 바르셀로나가 프랑코 집권 이후 이미 다섯 번이나 우승을 했을 때였다. 레알 마드리드가 황금기를 맞이했던 것 역시
1953년부터였는데, 이는 전설적인 마드리디스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이적해온 시기와 같다. 바로 그 디 스테파노와 함께,
레알 마드리드는 여덟 번의 리그 우승과 다섯 번의 유러피안 챔피언 컵
(오늘날의 챔피언스 리그)을 획득했다.
결국 레알 마드리드의 빛나는 기록은 프랑코 덕분이었다기보다는 디 스테파노 덕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영입 시장에서의 프랑코
오늘 나온 제 기사로 대체합니다.
* 디 스테파노가 프랑코의 개입으로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갔다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
* 한 줄 요약: 바르셀로나가 돈 쓰기 싫다고 징징댐+비즈니스 호구+초기 활약 못 미더움=디 스테파노 포기 -> 바르샤 망.
코파 델 레이에서의 프랑코
코파 델 레이 결과를 보면, 프랑코가 왜 레알 마드리드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지가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현재는 국왕컵으로 번역되는 대회 코파 델 레이는 프랑코의 집권 당시에는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Copa del Generalisimo/직역하면 총통컵)
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현재까지 코파 델 레이를 18회 우승한 레알 마드리드는, 프랑코 집권 당시에는 단 6회를 우승하는 데 그쳤다. 이 총통컵의 최다 우승팀은 반 마드리드 감정으로 유명한 바르셀로나와 빌바오로, 각각 9회를 우승했다.
총통 프랑코는 단 한 번도 두 팀에게 트로피를 수여하는 데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프랑코
무엇보다 레알 마드리드가 프랑코 덕에 라 리가에서의 최다 우승을 기록했다면, 유럽 대항전에서의 성적은 그를 따라올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가 챔피언스 최다 우승을 한 시기는 스페인에서의 황금기와 정확히 맞물린다. 1955년부터 1960년까지 레알 마드리드는 다섯 차례 연속으로 당시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이었던 유러피안 챔피언스 컵을 우승했으며, 61-62 시즌과 63-64 시즌에는 준우승을 하기도 했다. 65-66 시즌에 다시 한 번 레알 마드리드는 우승컵을 거머쥔다.
이 역시 프랑코 덕분이 아닌가 생각한다면, 그건 프랑코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셈이다.
우선 여타의 유럽 국가와는 달리 스페인은 산업 혁명을 맞이하지 못했으므로, 경제적으로 발달된 나라는 분명 아니었다. 오죽하면 내전 당시 양측이 외국의 지원에 군수품을 의존해야만 했으며,
프랑코가 승리한 이유도 소련에만 원조를 받을 수 있었던 공산주의자의 공화당 파와는 달리 국가주의자 당은 이탈리아, 독일, 아르헨티나 등 여러 국가에 원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있을 정도다.
내전이 끝난 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에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었다. 프랑코는 내전 당시 인민전선과 싸우는 데 전투기까지 동원하며 크게 도움을 주었던 이탈리아와 독일을 도우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내전 이후 참전할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중립을 선언했다.
실제 정치적,
경제적으로 불안정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일부 역사가는 그 이유가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이 경제적으로 스페인을 지원했던 데 있다고 말한다.
스페인이 독일과 이탈리아의 편에 서면,
지리적 특성상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항로가 끊겨 미국의 원조가 힘들어졌기 때문에,
연합국에게 있어 스페인의 중립은 상당히 중요했다. 실제로 그 후 미국과 영국은 스페인의 군사 정부를 승인하는 것은 물론,
상당히 많은 경제적 이득을 스페인에게 안겨주었다.
물론 독일은 스페인이 추측국의 편에만 서면 전쟁이 한결 수월해지기 때문에, 내전 당시 상당히 많이 도와줬다는 것을 근거로 스페인의 참전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프랑코는 모호한 관계를 취했는데, 공식적으로는 중립이되 시민병의 자발적 참전은 허용했던 셈이다. 대부분의 시민병은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의 편을 들었다. 비밀리에 항구와 비행장을 제공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히틀러가 영국 공격을 위해 지브롤터 해협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표면적으로는 완벽한 중립을 취했다.
이 시기는 프랑코의 대 유럽 영향력이 가장 컸던 시기였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향력은 전쟁이 끝남에 따라 점점 쇠퇴했다.
스페인이 사실은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는 설이 퍼지며, 영국과 프랑스 및 많은 유럽의 국가들이 스페인을 배척했다. 스페인이 민주주의 정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 역시 국제 사회에서 스페인이 따돌림을 당하는 데 한몫했다.
1945년 이후,
스페인은 유럽은 물론이거니와 세계에서 거의 고립당했던 셈이다.
1958년이 되어서야 미국의 반공 정책에 따라 스페인은 국제 관계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 후에도 경제적 불안정, 독재 정권 등의 이유로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냉전이 아니었다면 국제 연합조차 가입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프랑코가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유럽에 끼친 영향력은 보잘것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프랑코의 힘이 챔피언스 리그에 닿았다는 것은 더욱 얼토당토않다.
되려 프랑코가 그런 국제 관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이용했을 수는 있다.
레알 마드리드의 당시 빛나는 성적은 국제 관계에서 어려움을 갖고 있던 스페인에게 있어 자부심 그 자체였다.
사실 프랑코가 처음에 응원하던 팀은 아틀레티코 데 마드리드였다.
아틀레티코는 당시 ‘아틀레티코 공군’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 군대 클럽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이 국제적으로 고립됐던 1950년대, 국제 대회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눈부신 활약을 펼치자 그 눈길이 옮겨졌다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다. 당시 한 장관은 “레알 마드리드는 스페인이 가진 최고의 홍보 대사이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런 발언에 따라 아틀레티코의 팬들이 “el equipo del gobierno, la verguenza del pais (정부의 팀,
나라의 수치)"라는 찬트를 부르기도 했지만, 앞서 말했듯 프랑코가 레알 마드리드를 도왔다고 보기는 힘들다. 되려 성적이 좋아짐에 따라 레알 마드리드가 스페인의 명성을 높였고,
그렇게 프랑코가 레알 마드리드에 고마워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국제 관계 및 관광 산업 등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최대한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만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유럽 대항전에서 더 좋은 성적을 보였더라면, 정부의 앞잡이라는 오명은 되려 아틀레티코가 가져갔을 것이다.
프랑코 독재 시절 카탈루냐나 바스크 지방이 박해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게르니카 폭격은 여전히 바스크 지방의 상처로 남아 있으며, 프랑코의 개입은 증명되지 않았다지만 군부 경찰이 바르셀로나 선수들을 협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과 관계없이, 단순히 비난을 위해 내뱉는 음모론은 지양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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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덧붙일게요.
프랑코와 레알 마드리드의 관계에 대해 얘기할 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시는 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내전 당시에는 프랑코의 편에서 싸운 군인 출신입니다. 아마 Nationalist를 민족주의자로 번역하면서 생긴 오해가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이 상황에서 더 올바른 번역은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국가주의자라고 생각해요.
당시 스페인 내전에서 싸운 두 진영은 Nationalist (국가주의자/파시스트. 프랑코의 수하)와 Republican (공화주의자)였습니다. 단, Republican은 단순히 공화주의자로만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라,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으로도 이루어진 집단이었어요. 바르셀로나에는 이러한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가 많았고, 위에 언급했던 조셉 수뇰도 이런 공산주의 인사였습니다. 소련이 스페인 내전 당시 리퍼블리칸을 도운 이유도 공산주의자들이 다수였기 때문이죠. 실제로 혹자들은 스페인 내전에서 국가주의자 진영 (프랑코)이 이긴 것도 Republican은 그 이데올로기가 너무나도 중구난방이라 통합, 화합이 힘들었다는 데 그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도 합니다.
어떻게 되었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프랑코의 밑에서 싸운 군인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레알 마드리드의 인사 전부가 이렇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해요. 앞서 말했듯, 수많은 레알 마드리드의 임원진이 프랑코에 맞서 싸우다 죽거나, 고문 당하거나, 도망쳐야만 했거든요.
게다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축구에 정치가 개입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피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런 전적이 큰 영향을 미치진 않았어요. 애초에 반은 프랑코 편이었고 반은 리퍼블리칸 편이었으니 그게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지도 않았겠죠. 점점 프랑코 편이 늘어나기도 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바르셀로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프랑코의 편이기도 했어요. 그만큼 프랑코가 '우리에게 오면 먹을 것을 주겠다'고 하기도 했고, 당시 스페인 전체가 기아에 허덕이기도 했구요.
어쨌든, 많은 분들이 오해하실까봐 적어봅니당 :)
조금 복잡한 내용이었는데, 다 읽어주셨다면 정말 진심으로 감사합니당 <3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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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고는지단 2013.11.29레네트님은 역시 최고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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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코 2013.11.29AT는 저때나 지금이나 하는짓들이 졸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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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쿠 2013.11.29한국에서 축구를 수박겉핥기식으로 아는 사람들은 우리팀을 별로 안좋게 인식하는것같아요. 빨리 이런 인식이 바뀌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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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 2013.11.29레알의 업적이 대부분 독재정권에 의한 것이라는 말은
진짜 어불성설이란 거네요
챔스 9회우승이 그렇게 쉽게 되나요 ㅎㅎ
여튼 잘읽었습니다 -
쭈닝요 2013.11.29정말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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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닝요 2013.11.29카탈루냐에서 낸 3류 책한권 가지고 희한한 비방과 편견을 사실인양 우기던 분이 있었는데... 이런 좋은 글이 더 널리 읽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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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directory_arrow_right Ronnie.9 2013.11.30@쭈닝요 그쪽 당사에선 신으로 추앙받던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뭘 하시나 모르겠네요. 3류 책 한권으로 선동하고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페인 역사에 대해 엄청나게 잘 알고 있어서 이것 저것 물어봤던 기억도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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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키 2013.11.30프랑코는 사실 축구에 그닥 관심도 없었다는 게 유머 아닌 유머죠. 마드리드가 프랑코에게 득본거라기 보다 , 프랑코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사이의 라이벌리즘으로 득을 본겁니다. 사람들의 불만이 이 두팀간의 라이벌리즘으로 해소가 되어버리니. 게다가 말씀하신대로 마드리드가 5회 연속 유러피언컵을 들어올리면서, 2차대전 후에 고립되어진 스페인의 위상을 끌어올리는데 엄청난 공헌을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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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2013.11.30카탈루냐 역사에 아픔이 많긴 하군요. 그치만 이를 바르샤에 지나치게 확대적용하는 건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이는군요.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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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ul 2013.11.30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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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u 2013.11.30ㅊㅊ~ 잘봤습니다.
예전에 라키님이 올려주신 글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봣었는데
이런글이 널리 퍼저야할텐데 아직도 레알? 독재옹호팀 이라는
인간들이 있어서 에휴 -
레알킹왕짱임돠 2014.11.11감사합니다 잘봤습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