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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않는 박쥐군단, 발렌시아CF

야속한구티´-Τ 2011.12.24 23:21 조회 3,102 추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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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역사 소개


발렌시아는 1919년에 창단되었다.

1919 년,  옥타비오 아우구스토 밀레고가 곤살로 메디나와의 동전던지기에서 이겨 첫번째 클럽의 회장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언론은 스포츠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당시 발렌시아의 축구클럽 창단은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발렌시아에 축구클럽이 생기기 전에도 도시에서는 축구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곤 했다. 이유는 바로 지금도 유명한 '발렌시아 오렌지' 덕분이었다. 오렌지 수출을 하던 사람들이 축구의 종주국인 영국을 오고가며 서서히 축구는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1908년에 '발렌시아C.F'와 연고지를 발렌시아로 같이하는 현재의 '레반테UD'가 창단 되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국내의 우수팀들을 모아 리그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발렌시아도 리그에서 플레이하길 원했지만 역사와 실적이 부족했기때문에 스페인의 1부리그에서 뛰기 까지는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부리그로 입성 한 후 발렌시아는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그들의 좋은 행보는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스페인 내전 때문이다. 발렌시아 뿐 아니라 이 시절 많은 클럽들이 어려움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스페인 내전 종결 이후, 발렌시아는 누구보다도 빨리 재건에 성공하면서 스페인 내전을 기점으로 승승장구하며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1940년대는 발렌시아라는 클럽의 위용을 날린 첫번째 시대가 되었다. 1941/42시즌, 발렌시아는 드디어 1부리그 입성에 성공했고 주목 할 만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스페인 내전은 팀의 행보를 1941년 까지 막았다. 그리고 드디어 1941/42시즌 발렌시아는 클럽 최초의 리그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1940년대 발렌시아는 2번의 리그우승을 했고 클럽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잘나가던 발렌시아는 50년대에 들어서 레알마드리드의 디 스테파뇨 같은 외국인 선수들이 스페인에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좋은 선수진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그리 좋지 못하였다. 그 후로는 푸차대스, 켐페스 같이 발렌시아의 영웅으로 불리는 선수들의 시대가 차례로 오면서 팀은 괜찮은 성적을 유지했다.

지금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를 대표하는 팀중 하나인 발렌시아지만, 이들에게도 잊지 못하는 암울한 과거가 있다. 바로 세군다리가(2부리그)로 강등된것이다. 1982년 스페인의 월드컵 개최를 하면서 발렌시아는 월드컵 공인구장으로 쓰일 메스타야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야만 했고, 이는 곧 팀의 재정악화로 이어졌다. 선수들과 스태프들의 주급이 밀리는 등 팀의 상황은 바닥까지 내려가면서 리그 막바지에 끝에 걸려 간신히 버텨오던 발렌시아는 결국 1985/86시즌에 결국 강등 당하고 말았다. 당시의 2부리그 강등은 구단 역사상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발렌시아가 1부리그로 돌아오고 감독으로 재부임한 디 스테파뇨와 함께 발렌시아는 제자리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2년 발렌시아의 클럽구조는 주식회사로 변했고 몇번의 주춤거림을 딛고 새로운 천년의 시작과함께 발렌시아의 새로운 시대도 열린다. 2000년대 축구계를 소개한다면 발렌시아는 할 말이 많아진다.  1999년 부터 2004년까지 발렌시아는 클럽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맞게된다. 01/02시즌에는 리그 타이틀을 획득했고  한번의 UEFA컵 우승, 한번의 코파 델레이 우승과, 한번의 UEFA 슈퍼컵 우승을 6년간 하였고,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두번 진출하였다.

3년간 성공적인 성적을 보인 베니테즈감독은 2004년 여름, 회장과의 문제로 리버풀로 떠나고 만다. 비야레알과 세비야 등 급하게 리가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오는 팀들에 발렌시아는 밑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심각한 재정악화 까지 더불어 팀의 주축이던 '다비드 비야'와 '다비드 실바'가 팀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스페인을 떠나고 말았다. 비야와 실바의 이적에 뒤이어 홀로 남았던 에이스 '후안 마타' 마저 팀을 떠나 첼시로 가게된다.

발렌시아의 첫번째 구장은 '알히로스'로 당시 3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알히로스는 '메스타야'가 건설되기 1923년 까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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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클럽 크랙들

이름 : 안토니오 푸차데스(Antonio Puchades Casanova)

생일 : 1925년 6월 4일

출신 : 스페인 발렌시아 수에카

포지션 : 수비형 미드필더

'안토니오 푸차데스'시대를 연 한 외국인 선수가 스페인축구에 상륙했다!
수에카 출신의 이 미드필더는 그의 고향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1946년에 발렌시아의 일원이 된다그리고 그는 57-58시즌까지 팀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십년동안 발렌시아에서 푸차데스는 여러 타이틀을 땄다.
푸차데스는 강력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한 수비형 미드필더이다. 기술도 매우 좋아서, 중앙에서 조율과 함께 활발한 공격가담을 하기도 했다. 스페인 역사상 가장 뛰어난 미드필더 중 한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가 은퇴할 시기까지 그는 발렌시아의 키플레이어였다. 33살의 나이에 좌골신경통으로 인해 축구를 그만두고,  은퇴 후 그의 고향 수에카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 경기장이 생겼다. 그는 발렌시아와 스페인 국가대표팀에서 13시즌동안 좋은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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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리오 켐페스 (Mario Kempes)

생일 : 1954년 7월 15일

출신 : 아르헨티나

포지션 : 공격수

마리오 켐페스, 그는 1976년에 발렌시아에서 데뷔했다, 그는 페널트킥 실축과 함께 좋지 못한 출발을 했다
아르헨티나 태생인 그는 중앙 공격을 담당했다. 그는 76-77, 77-78 시즌 두번의 피치치(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득점왕과 MVP를 수상했다. 켐페스는 월드컵을 세번이나 참가한 드문 선수들 중 한명이다. 그는 페널트킥, 프리킥, 헤딩 등등 모든 위치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골을 넣다. 켐페스에게는 어느 포지션이든 골을 넣기 편했다.

그는 1981년 아르헨티나의 리버플레이트로 이적했고, 1982년 다시 발렌시아로 돌아가 2시즌 동안 활약했다. 1970년대 당시 아르헨티나의 메노티 감독은 당시 범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17세 신동 마라도나를 엔트리에서 탈락시킨 후 “우리에겐 켐페스가 있지 않은가”라는 유명한 한 마디를 남기기도 했다. 켐페스는 아르헨티나와 발렌시아의 역사적인 레전드로 인정 받고 있다.
마라도나와 켐페스가 이끌던 아르헨티나는 무적에 가까웠고 IFFHS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아르헨티나 선수 부문에서는 6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남겼다.

현재는 ESPN의 분석가 겸 축구해설가로 활동하고 있고, '독설가'로써 유명세를 떨쳐 왔다. 켐페스는 “컨디션이 좋을 때의 리켈메는 분명 최고의 미드필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나로 하여금 TV를 창밖으로 집어 던지고 싶도록 만든다. 일단 리켈메는 너무 느리고 기복도 심하다” 라는 발언을 하며 아르헨티나 내에서 상당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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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히카르도 아리아스 (Ricardo Penella Arias)

생일 : 1957년 2월 25일

출신 : 스페인 발렌시아

포지션 : 중앙 수비수

 

히카르도 아리아스는 클럽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들 중 한명이다. 그는 16시즌을 팀과 함께 했고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했다. 아리아스는 팀이 2부리그로 강등되었을 당시, 다음 해 1부리그로 승격시키는데 일조한 일원 중 한명이다. 그는 많은 시즌을 발렌시아에서 보냈지만 공격엔 일조하지 않는 스타일이라 득점은 단 하나 뿐이 없다.  히카르도 아리아스는 발렌시아 유스 출신으로 1976-1977 시즌에 단 17세의 나이로 1군 팀에 데뷔하였고 데뷔 초 어린 시절엔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비수로 정착했다. 그는 437경기를 소화하면서 페르난도 고메스에 이어 클럽역사상 두번째로 많은 경기 출장기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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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페르난도 고메스 (Fernando Gomez Colomer)

생일 : 1965년 9월 11일

출신 : 스페인 발렌시아

포지션 : 공격형 미드필더

발렌시아는 페르난도 고메스에게 축구선수로써 영광의 장소이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발렌시아에서 보냈고, 434경기 출전으로 클럽 통산 최다출전과  모든 대회 총합 142골로 발렌시아 통산 득점 4위라는 기록을 갖고있다. 그는 한 때 발렌시아를 이끌던 주장이었다.

 페르난도는 1984년 1월 15일 바야돌리드 전에서 B팀 메스타야에서 올라와 프리메라 리가에 데뷔하였다. 1998년 그는 발렌시아를 떠나 잉글랜드의 울버햄튼 원더러스로 이적하였다. 하지만 단 한시즌만 머물고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같은 발렌시아 주의 클럽 카스테욘으로 합류하였다.

카스테욘에서 한시즌 뛴 뒤 tv와 라디오 해설자를 하다 최근 얼마전 까지만 해도 발렌시아의 단장으로써 좋은 선수들을 싸게 영입하는 등 좋은 활동을 보였지만, 요렌테 회장과의 의견충돌로 2010년 스스로 단장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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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벤 바라하 (Rubén Baraja Vegas)

생일 : 1975년 7월 11일

출신 : 스페인 바야돌리드

포지션 : 수비형 미드필더 / 중앙 미드필더

'피포' 바라하는 발렌시아 팬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장 사랑받는 선수다. 그는 팀의 황금기를 같이 맞이 했으며, 많은 트로피를 거머줬다.

처음에 루벤 바라하는 자신이 태어난 바야돌리드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1996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러브콜을 받아 이적하였지만, 1999년에 A팀 데뷔 경기를 치루고 1년 후 팀이 강등되면서 마드리드에서의 커리어를 접었다. 그리고 발렌시아 CF는 당시 팀 내 최대 이적료 지출액인 1250만 유로로 바라하를 데려왔고, 그는 팀의 레전드로 성장하게된다.

그는 첫 시즌에 팀이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올라가는데 큰 공을 세웠고, 결승전에서 마지막 페널티킥 상황에서 침착하게 킥을 성공시켰으나 팀은 바이에른 뮌헨에게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후에 바라하는 꾸준한 활약을 하며 팀을 도왔고 알벨다와 이룬 중원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중원 라인 중에 하나로 알벨다-바라하(A-B)라인을 꼽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그는 발렌시아의 악몽기인 07/08시즌 팀 내 주장인 알벨다를 비롯, 또 다른 기둥인 카니자레스, 앙굴로가 배제된 상황에서 주장을 맡았다.

 발렌시아 생활 10년째인 2009/10 시즌을 마지막으로 발렌시아에서의 커리어를 접게 되었다. 시즌 마지막 라운드 테네리페전에서 팬들과 선수들, 스탭진 모두가 성대한 고별식으로 그의 앞으로의 도전에 축복을 기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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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 왜 박쥐군단?

박쥐군단 발렌시아, 박쥐는 왜 발렌시아의 상징이 되었을까?
발렌시아는 지중해변에 위치한 도시로, 박쥐들이 많이 산다는 점을 첫번째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리고 박쥐가 상징이 된데에는 한가지 일화가 있다.
13세기 초 당시 스페인은 크리스트교와 이슬람세력으로 국가가 나위었다. 아라곤 왕국의 왕 하이메1세는 이슬람세력으로 부터 영토를 회수하기 시작했고, 이슬람세력 중 하나이던 발렌시아는 목표 중 하나였다. 발렌시아로 전진 중, 하이메1세의 깃발에 박쥐가 내려앉았고 공격하기 전날 밤에도 방으로 박쥐 한마리가 들어왔다.

그는 이를 좋은 징조로 보았고 발렌시아 진격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 후로 박쥐는 발렌시아에서 행운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팀의 상징이 되었다. 발렌시아를 똑같이 연고지로 하는 클럽 '레반테UD'의 엠블럼에도 박쥐가 있다.
또한 바르셀로나의 창단시기의 엠블럼에도 박쥐가 있었고, 세군다리그 '알바세테 발롬피에'의 엠블럼에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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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제 배경지식이랑 글쓰면서 얻은 정보들로 재구성해서 제가 쓴 글입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 스페인클럽에 대해 조금씩 소개해보려합니다^^;
그리고 원래는 제가 쓰던 글 모아두기 위해 사용했던 블로그인데,
이제 블로그 활동 해보려고 혹시 다음 하시는 분들 들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blog.daum.net/alamad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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