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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역사 上] 태동기부터 1970까지

Robinho! 2011.05.06 02:08 조회 2,866 추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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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축구의 시발점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브라질 아이들도 모래 구장에서 축구를 즐긴다. 동네 어느 곳이든 공간이 있으면 친구들과 어울려 팀을 짠 뒤 경기에 임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팀에 대한 애정도 갖고 있다.

5살 어린 아이부터 백발의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종교 이상의 것으로 브라질에 자리 잡은 축구는 하나의 문화로써 브라질에 깊숙하게 자리 잡았다.

1894년부터 축구를 접한 브라질은 영국 출신의 아버지와 브라질 출신의 어머니를 둔 찰스 밀러를 통해 이루어졌다. 지주 출신인 그는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축구장을 건립했고, 영국에서 가져온 축구공과 유니폼으로 축구 클럽을 만들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을 바탕으로 브라질 국민은 축구에 빠졌으며 협회 창설 등. 축구 강국으로서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1914년은 브라질 축구에 큰 의미가 있는 해이다. 7월에는 잉글랜드팀이 브라질을 방문해서 친선 경기를 맺으면서 브라질 최초의 선발팀이 모습을 보여줬다. 같은 해 8월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의 원정 경기를 시작으로 국제 축구에 발을 내밀게 됐다.

이후, 브라질 대표팀은 191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축구 강호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지만,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등쌀에 밀리며 남미의 3인자로 전락하게 됐다. 이 때문에 그들은 1,2회 월드컵에서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으며 축구와는 인연이 없는 듯 보였다.

한편, 당시 브라질은 프로와 아마추어가 대립하는 구도였다. 현재는 각 지역의 주 리그를 비롯해, 코파 두 브라질과 전국 리그를 시행하며 1년 내내 팬들에게 축구라는 즐거움을 선물하지만, 상황이 달랐다. 우여곡절 끝에 아마추어와 프로가 합의를 맺으면서 오늘날의 윤곽을 드러냈으며 이후, 브라질은 강 팀으로 다시금 부상하게 됐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을 축구의 신도 알았을까?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레오디나스라는 당대 최고의 선수와 함께 축구 강호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됐다.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한 브라질은 그의 맹활약 때문에 4강 진출에 성공. '브라질리언' 그들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비록 레오디나스가 결승전 출전을 위해 이탈리아와의 4강전에 결장했다는 소문과 더불어 당시 이탈리아 권력자였던 무솔리니가 조국의 우승을 위해 브라질 대표팀의 경기장을 임의로 옮겼다는 불미스러운 얘기도 전해졌지만, 이 대회에서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진정한 챔피언에 가까웠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의 후유증 때문에 유럽 국가들이 월드컵 개최를 꺼리는 상황에서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와 함께 월드컵 개최를 선언했다. 전쟁의 피해를 덜 받은 남미국가의 입지를 살린 브라질은 1946년 7월 26일 룩셈부르크 시에서 열린 FIFA 총회에서 제4회 대회에서 월드컵 개최를 확정. 브라질 축구의 진정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통곡으로 바뀐 1950년 제4회 브라질 월드컵

앞서 말했듯이 2차 대회 직후 전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 빠졌다. 혼란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의 피해는 유럽과 아시아 곳곳에 스며들었으며 상대적으로 전쟁의 상처를 덜 받은 남미 대륙이 월드컵 기회를 얻게 됐으며, 브라질이 제4회 월드컵 개최국으로서 선정되는 행운을 얻게 됐다. (이전 시즌 우승을 차지했던 플라멩고의 홈 구장으로 유명한 히우 지 자네이루주의 마라까나 스타디움도 이 대회를 위해 건립됐다.)

대회 초반부터 브라질은 승승장구했다. 예선 라운드에 나선 그들은 스위스와 2-2로 비겼지만, 멕시코와 구 유고 슬라비아를 각각 4-0과 2-0으로 대파하며 결선 라운드에 진출했다. 예선에서부터 막강한 득점력으로 브라질의 선전을 이끈 아데미르는 레오디나스가 지난 대회에서 보여줬던 파괴력을 또 다시 보여주며, 우승 가능성을 점점 커지게 했다.

결선 라운드에 진출한 브라질은 첫 경기인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7-1로 대승을 거뒀다. 전반 17분 아데미르의 선제 득점으로 축포를 올린 브라질은 안데르센이 후반 22분 만회 득점을 넣은 스웨덴을 상대로 골 폭풍을 쏘아 올리며 우승을 위해 한발 다가선다. 반면, 우루과이는 스페인과 무승부를 기록했다. 또한, 접전 끝에 스웨덴에 승리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운명의 7월 16일, 브라질은 우루과이와의 결선 라운드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승리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앞선 두 경기에서 상대를 크게 격파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며 팀 분위기도 좋았다. 결승전이 열린 마라까나 스타디움은 브라질 대표팀의 첫 세계 제패를 지켜보기 위해 역대 기네스북에도 오른 관중 199,854명이 지켜보고 있었으며(비공식적인 관중까지 합하면 25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브라질은 무승부만 기록해도 월드 챔피언이 되는 최고의 기회를 얻게 된 상황이었다.

경기가 시작된 순간, 모든 이의 예상처럼 브라질은 우루과이를 상대로 파상공세를 펼쳤다. 쉴 새 없이 그들의 수비진을 공략했으며 홈 팬들에게 우승이라는 선물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우루과이의 철옹성 같은 수비는 좀처럼 쉽게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반 3분,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바로, 브라질의 프리아카의 발에서 선제 득점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선제 득점과 관중의 열광은 브라질 선수들에게 혼란을 일으켰다.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플라비우 코스타는 흥분한 선수들을 향해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서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라고 지시했지만, 대회 첫 우승만 바라보던 선수는 경기에 제대로 임하지 않았다. 수비 라인은 점점 허술해졌고, 모든 선수가 공만 잡으면 골을 넣기 위해 지나치게 의욕적인 모습만 보였다.

결국, 후반 21분 우루과이의 전설인 스키아피노가 동점골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브라질은 부담이 없었다. 지지만 않으면 우승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관중은 경기 시각이 흐를수록 하나의 허리케인처럼 거대한 함성을 질렀다.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라디오 앞에서 열광했으니 경기장에 온 관중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을 것이다.

후반 34분 축제의 분위기는 어느덧 어둠으로 변했다. 바로 선제 득점에 성공한 스키아피노의 패스를 받은 기지아가 역전 골을 넣은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선 라운드 마지막 경기에 임했던 우루과이가 난적 브라질을 제압한 것이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마라까나 스타디움은 고요함과 적막함이 공존했다. 열광적으로 브라질을 응원했던 관중은 힘을 잃은 채 쓸쓸히 경기장을 빠져나갔으며 예정됐던 모든 행사가 취소됐다.

이렇게 브라질의 첫 월드컵 결승 무대는 실패로 끝났다. 반면 우루과이는 4번의 대회에서 2번이나 우승을 차지. 세계 최고의 축구 강국으로 한 발 나아갔다. 한편, 1950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패한 브라질은 기존의 흰색 유니폼을 대신해 현재까지 그들의 상징이 된 초록색 선과 노란색의 티셔츠, 파란색의 반바지를 유니폼으로 채택했다.

불미스럽게 끝난 1954 스위스 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이 아시아 대표로 처녀 출전해 우리에게 익숙한 스위스 월드컵은 본격적인 축제의 서막으로 불렸다. 기존의 월드컵보다 규모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 국이란 오명을 쓰고 있던 독일이 출전한 이색적인 대회였다. 게다가 독일은 난적 헝가리를 제압하는 베른의 기적으로 월드컵 첫 정상을 차지했다.

한편, 브라질은 멕시코와의 예선 첫 경기에서 5-0으로 대승을 거두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이후, 구유고슬라비아(이하 유고)와의 맞대결에서는 1-1로 비겼다 그러나 골 득실에서 우위를 점하며 조 1위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 진출한 브라질은 저번 대회에서의 부진을 만회할 것이라는 기대감과 달랐다. 그들은 대진표를 보는 순간 좌절감에 빠졌을 것이다. 브라질의 상대는 당대 최고의 골잡이인 푸스카스와 콕시스가 버티는 헝가리였다.

당시 헝가리는 최강 그 자체였다. 무적의 마자르 군단으로 불리는 그들은 예선에서 만난 대한민국과 독일을 각각 9-0, 8-3으로 누르며 이 대회 우승후보 0순위다운 모습으로 통과했다. 나아가 지난 3년간 무패행진을 달리는 팀이었다. 경기는 예상대로 헝가리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날 경기는 대혈투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큼 비신사적인 행동으로 얼룩진 오명을 쓰게 됐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헝가리의 히데구티가 전반 4분 만에 선제 득점을 넣었을 때 그의 바지가 벗겨진 것을 본 브라질 수비수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자 시비가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시비는 주먹다짐으로 번졌다. 경기를 관람하던 관중도 경기장에 나와 집단 난투극을 벌였다. 경찰의 제재로 불미스러운 사건은 끝을 맺은 듯싶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헝가리 숙소에 난입한 브라질 선수들 때문에 더욱 고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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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alma Santos, Zito, Mauro, Nilton Santos, Joel e Gilmar. Garrincha, Didi, Pelé, Vavá e Zagallo.

두 명의 천재가 등장한 1958 스웨덴 월드컵

20세기를 대표하는 축구 선수를 꼽자면 축구팬 다수는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 프란츠 베켄바워 등을 떠올릴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중에 가장 많은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며 축구의 신으로 불리는 선수는 브라질 출신의 펠레밖에 없을 것이다.

17살이란 어린 나이에 월드컵에 출전해 조국에 우승컵을 선사한 펠레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법사 같은 플레이로 팬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탄탄한 체구에서 비롯되는 빠른 주력과 정확한 드리블,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마무리 능력은 그 어떤 선수와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특별했다.

펠레의 재능이 처음부터 발휘된 것은 아니었다. 스웨덴 원정에 나선 브라질은 우승 후보 중 하나로 꼽혔다. 하지만, 지난 대회 헝가리의 푸스카스, 콕시스처럼 한 방을 보여줄 수 있는 슈퍼스타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와의 첫 경기에서 3-0으로 이긴 브라질은 2차전에서 잉글랜드와 무득점으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는 그들의 불 안전한 전력을 암시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강호가 아니었으며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는 팀이었다. 조별 예선에서 브라질은 2경기 동안 3골을 기록하는 득점력 빈곤으로 긴 고민 끝에 어린 펠레란 히든카드를 꺼냈다. 예선에서 기록한 3골이 모두 약체 오스트리아였음을 참작할 때 그들은 다른 우승 후보보다는 2% 부족한 공격력을 지닌 팀이었다.

당시 브라질 감독인 비센트 페올라 감독은 소련과의 경기를 기점으로 펠레와 가힌사라는 최고의 공격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늘과 실처럼 하나가 된 펠레와 가힌사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며 브라질을 강호로 한 발 나아가게 했다. 이러한 페올라 감독의 전술은 웨일스와의 8강전에서도 효력을 발휘. 브라질은 펠레의 골에 힘입어 4강에 진출하게 됐다.

기대보다는 우려가 컸던 페올라의 도박은 성공했다. 또한 펠레와 가힌사를 얻은 브라질은 역대 월드컵 한 대회 최다 득점자인 퐁텐느가 버티는 프랑스마저 5-2로 제압. 결승에 진출한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인 양 팀은 후반 중반부터 득점포를 가동한 펠레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브라질의 완승으로 끝났다.

8년 만에 월드컵 결승 무대에 진출한 브라질의 상대는 홈 팀인 스웨덴이었다. 스웨덴도 개최국답게 승승장구하며 소련과 서독을 차례로 격파했다. 이들 역시 브라질과 마찬가지로 월드컵 첫 우승에 목마른 상태였다. 게다가 스웨덴은 AC 밀란의 전설적인 포워드 중 하나인 닐슨 리드홀름을 보유하며 펠레와 가린샤의 브라질에 대적할 수 있는 충분한 강팀이었다.

당시 스웨덴의 잉글랜드 출신 감독 레이너는 자신의 팀이 선제 득점으로 브라질을 꺾고 월드컵에 우승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이러한 그의 발언이 효과를 얻은 것인지 스웨덴은 전반 4분 만에 리드홀름이 선취 득점을 넣으며 스웨덴이 기선제압에 성공했다. 브라질 수비진의 압박이 없는 틈을 타 리드홀름은 페널티 박스 중앙에서 지우마르를 속이며 침착하게 골을 넣었다.

그러나 레이너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까지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었다. 월드컵 초대 대회 우승팀 우루과이를 기점으로 베른의 기적을 만든 서독까지 우승팀은 모두 역전승을 거뒀다. 브라질은 이미 1950년 대회에서는 우루과이에 역전패했다. 이들은 선제 득점 후에도 집중력을 유지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레이너의 월드컵 제패는 전반 9분과 32분에 나온 바바의 동점골과 역전 골에 물거품이 됐다. 이는 페널티 박스 내에서 지속적인 공격력을 시도한 브라질의 성과였으며 스웨덴 수비가 바바를 느슨하게 마킹을 하자 순간적인 침투로 두 번의 슬라이딩 슈팅으로 연결하며 역전한 것이다.

이후, 브라질은 후반 11분에 펠레가 가슴으로 받은 공을 허벅지로 트래핑하고 높이 떠오르자 오른발로 깔끔하게 마무리 지으며 3-1로 달아났다. 이 외에도 세트 피스 상황에서 스웨덴 수비진의 실책을 틈타 마리오 자갈로가 차분한 왼발 슈팅으로 팀의 4번째 득점을 넣었으며 한 골을 만회한 스웨덴에 찬물을 껴 얹듯이 펠레가 종료 직전에 헤딩 슈팅으로 5-2 대승을 이끌었다.

한편, 이 대회는 펠레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까지 역대 브라질을 대표하는 최고의 라이트 윙 어로 불리는 가힌사는 제대로 걸음걸이마저 할 수 없을 만큼 신체적으로 열악한 선수였다. 하지만, 자신의 신체적 단점을 효율적으로 이용했다. 소아마비 때문에 오른쪽 다리는 굽어 있었고 왼쪽 다리는 6cm나 작았던 그는 믿기지 않는 주력을 바탕으로 탁월한 방향 전환과 드리블, 바나나 킥으로 불리는 위협적인 중거리 슈팅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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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alma Santos, Zito, Gilmar, Zózimo, Nilton Santos e Mauro. Garrincha, Didi, Vavá, Amarildo e Zagallo

1962 칠레 월드컵, 대회 2연패에 성공한 브라질

스웨덴 대회에서 브라질은 6번의 도전 끝에 월드컵 우승에 성공했다. 우승뿐 아니라, 그들은 펠레, 가린샤, 바바로 이어지는 최정상급 공격진을 보유하게 됐고 지우마르, 지또, 닐똔 산또스, 마우로 하모스로 이어지는 수준급 수비진도 갖추게 됐다.

브라질은 북중미에서 유일하게 출전한 멕시코를 상대로 자갈로와 펠레의 득점(당시 펠레는 멕시코 수비수 5명을 가뿐히 제치며 득점에 성공했다)에 힘입어 2-0으로 승리하며 순조롭게 대회에 나섰지만, 구체코슬로바키아(이하 체코)와의 2차전에 나선 브라질은 지난 대회에서 빼어난 활약을 보여준 펠레가 체코의 골키퍼인 슬로프와의 충돌 과정에서 생긴 부상으로 대회에서 하차. 위기를 맞는다.

자갈로와 가힌사의 좌우 측면과 바바가 나서는 최전방은 여전히 위협적이지만, 펠레의 부재는 최강이라고 하기에는 2% 부족해 보였다.

그럼에도, 브라질은 강했다. 펠레 없이 스페인과 치른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그를 대신해 출장한 아마히우두가 동점 골과 역전 골을 넣으며 팀의 토너먼트 진출을 이끈 것이다.

8강에 진출한 브라질의 상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인 바비 찰턴이 버티는 잉글랜드였다. 훗날 4년 뒤 다음 대회에서 우승한 축구 종가는 브라질의 가린샤와 바바에 마술쇼에 농락당하며 패했다.

준결승 개최국인 칠레였다. 당시 칠레는 1964년에 전국을 강타했던 대지진의 아픔을 뒤로하고 카를로스 디트볼(당시 축구 협회장)의 극진한 노력에 힘입어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개최권을 따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과물로써, 칠레는 이 대회에서 역대 최고의 성적인 3위를 기록했다. 월드컵을 일 년 앞두고 심장마비 때문에 고인이 된 그의 행보가 아쉬울 뿐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칠레는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제치며 서독과 함께 토너먼트 진출에 성공했으며 소련과의 8강전에서 접전 끝에 2-1로 승리. 브라질과의 맞대결을 펼치게 됐다. 개최국 칠레가 돌풍을 일으키자 조직 위원회는 기존의 경기장보다 더욱 넓은 산티아고로 준결승 장소를 변경했다. 칠레 국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 속에서 펼쳐진 이날 경기는 가린샤와 바바가 각각 2골을 넣으며 브라질의 4-2 승리로 끝났다.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유혈 사태에 돌입했었던 칠레 관중은 이 날 경기까지 선전했던 대표팀을 오히려 격려하는 훈훈한 광경도 연출했다.

브라질의 결승 상대는 유고를 3-1로 격파한 체코였다. 조별 예선에서 맞붙은 전례가 있는 양 팀은 강력한 창을 보유한 브라질과 든든한 방패를 지닌 체코의 대결로 관심이 쏠렸다. 다른 스타일로 경기에 임하는 양 팀이기 때문에 예측이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제 득점은 체코의 마조푸스트의 발에서 나왔지만, 펠레를 대신해 경기에 출장했던 아마히우도의 동점골과 지또, 바바의 연속 득점에 힘입어 브라질이 3-1로 승리했다.

이로써 브라질은 지난 대회에 이어 월드컵 2연패에 성공. 축구 강호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굳혔다. 게다가 축구 황제 펠레가 없이 진행된 대회에서 이루어낸 우승이란 성과는 그들의 놀라운 스쿼드에 대한 답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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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펠릭스, 피아차, 브리투, 클로도아우두, 마르시우 안토니우, 자이르지뉴, 제르손, 토스탕, 펠레, 히벨리누

▶ 패배의 쓴맛도 잠시, 완전한 팀으로 돌아온 1970 브라질

브라질은 두 번의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 열린 1966년 월드컵에서 이변의 희생양이 되며 상승세가 한풀 꺾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에이스 펠레가 상대 수비의 거친 반칙 때문에 부상으로 중도 하차했기 때문. 여기에 가힌사의 부재까지 겹치며 예선 2번째 경기인 헝가리전에서 1-3으로 패했으며 나아가 1차 리그 최종전인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는 검은 표범 에우제비우의 활약에 고개를 떨어뜨리며 1-3으로 무릎을 꿇었다.

지난 두 번의 대회에서 얻은 우승이란 성과는 브라질에 강대국이란 명성을 주었지만, 잇따른 스타 플레이어에 대한 반칙은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특히 이 대회 이후, 펠레는 다시는 월드컵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인터뷰까지 하면서 자신에 대한 수비수의 불필요한 반칙에 대한 혐오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그럼에도, 펠레의 애국심은 꺾이지 않았다. 역대 최고의 드림팀으로 불린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의 브라질은 돌아온 펠레를 주축으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브리투, 피아차, 자이르지뉴, 히벨리누, 토스탕, 제르손, 클로도알도 등, 내로라하는 스타 플레이어의 맹활약에 힘입어 줄리메 컵의 영구 소유자가 됐다.

마리오 자갈로 체제의 이 드림팀은 4-2-4전술과 4-3-3전술을 혼용하는 형태로 팀을 만들었다, 우선, 최전방 포워드로는 하얀 펠레로 불린 불운의 사나이 토스탕이 나섰다. 그 아래에는 축구 황제 펠레가 위치했다. 두 선수 모두 개인기와 드리블이 뛰어나기 때문에 상대 수비진을 흔드는 능력은 독보적이었다.

한편, 좌, 우 날개는 히벨리누와 자이르지뉴가 맡았다. 악마의 왼발로 불리며 호베르투 카를루스보다 뛰어난 프리키커라는 평가를 받는 히벨리누가 좌측을 맡았고, 가힌사의 후계자로 불리며 이 대회 전 경기 득점에 성공한 자이르지뉴가 우측을 담당했다.

중앙 미드필더인 제르손과 클로도알도는 각각 다른 역할을 담당했는데 제르손은 오늘날의 안드레아 피를로처럼 빌드업 과정에서 팀 공격의 시발점이 되며, 플레이메이커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반면 클로도알도는 홀딩 미드필더와 유사했다. 게다가 빼어난 드리블 능력을 바탕으로 공격에 가담하는 능력도 지녔다.

측면 수비진은 아우베르투, 에베르아우두가 나섰는데 두 선수는 브라질 대표팀에서 은퇴를 선언한 카푸, 카를루스와 유사했다. 공수 양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며 기회가 생기면 적극적인 오버래핑으로 직접적인 득점에 가담했다. 좌우 측면을 장악했던 이들은 수비와 적극적인 공격 참가로 현대축구에 풀백의 원형이 되었다.

중앙 수비진은 제공권과 공중볼 장악이 뛰어난 브리투와 피아차가 나섰다. 두 선수의 호흡도 좋았기 때문에 당시 브라질은 안정적인 수비진영을 갖추게 됐다.

前 대회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은 수비 축구의 중요성을 알려준 대회였다. 지금보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미미한 부분이 보여지지만, 당시 흐름은 안정적인 수비를 기반으로 지키는 축구를 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럼에도, 자갈로가 이끈 브라질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공격으로 승승장구했다. 역대 월드컵 대표팀 중에서 최고로 불리는 이 팀은 빼어난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에 공격력에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마치 한 골을 내주면 두 골을 넣을 수 있을 만큼 든든한 선수들이 포진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팀으로 불렸다.

▶ 드림팀의 월드컵 제패, 줄리메 컵을 영구 소유하다

잉글랜드, 루마니아, 체코 슬로바키아(이하 체코)와 한 조에 속한 브라질은 체코와의 예선 첫 경기에서 펠레와 히벨리누, 자이르지뉴의 연속 득점에 힘입어 4-1로 승리를 거뒀다. 특히 자이르지뉴는 이 대회에서 전 경기 득점에 성공. 가힌사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입증했다. 게다가 자이르지뉴는 축구 황제 호나우두를 오늘날의 슈퍼스타로 만든 장본인이다.

체코와의 첫 대결에서 승리한 브라질은 전 대회 우승팀은 잉글랜드와 조별 예선 2차전을 치렀다. 고든 뱅크스, 바비 무어, 바비 찰튼, 조프 허스트 등 전 대회 주축 멤버들이 건재한 잉글랜드는 브라질, 서독, 이탈리아와 함께 이 대회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이 때문에 브라질과 잉글랜드와의 경기는 사실상 미리 보는 결승전과 다름없었다. 팽팽하던 양 팀의 경기는 자이르지뉴의 한 방에 힘입은 브라질이 승리했으며 이후, 그들은 루마니아와의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도 3-2로 승리. 조 1위로 8강에 진출했다.

8강 상대 페루는 브라질에 상대되지 못했다. 비록 테오필리오 쿠비야스라는 스타 플레이어가 있었지만, 브라질에는 그보다 많은 슈퍼스타가 존재했다. 결국 토스탕의 2골과 히벨리누, 자이르니쥬의 득점포가 터지며 쿠비야스와 가야르도가 각각 한 골씩 넣은 페루를 4-2로 꺾으며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 만난 우루과이는 브라질의 예상보다 강했다. 이미 1950년 자국 월드컵 결승전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안겼던 그들과의 대결은 브라질로서는 설욕의 기회였지만, 우루과이의 쿠비야가 전반 19분에 선제 득점을 올리며 줄리메 컵을 노리는 브라질에 쓴잔을 맛보게 했다.

하지만, 우루과이의 이날 선제 득점은 훗날 1982년 스코틀랜드와 브라질의 경기에서 지미 힐의 발언처럼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든 셈이 됐다. 이후, 브라질은 클로도알도의 동점골과 자이르지뉴의 역전 골, 히벨리누의 추가 득점까지 나오며 우루과이에 3-1로 완승했다. 게다가 우루과이 선수들은 브라질의 매서운 공격력에 흥분하며 잇따른 반칙으로 경고 3장이나 얻으며 자멸했다.

이로써 브라질은 6전 전승으로 파죽지세로 결승에 진출했다. 상대는 월드컵을 2번이나 제패했던 카테나치오의 이탈리아였으며 그들도 서독을 꺾은 상승세였기 때문에 1970년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은 줄리메 컵 주인의 옥석을 가리는 경기이자 명승부로 기대를 모았다.

참고로 국제 축구 연맹 FIFA는 클래식 풋볼이란 코너를 통해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1970년 월드컵 결승전 경기를 명 경기로 꼽았다.
6월 21일 결승전, 멕시코 시티의 아스테카 구장에 모인 관중은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월드 더비에 환호했다. 이러한 열광에 보답하듯이 펠레가 전반 18분 만에 헤딩으로 선제 득점을 올렸다.

비록 월드컵에서 선제 득점을 올리는 팀이 패한다는 공식이 존재했지만, 이날 펠레의 선제 득점은 브라질의 골 폭풍에 대한 예고편이었다. 징크스에 대한 고민을 하는 순간, 이탈리아의 동점골이 나왔다. 전반 37분 보닌세냐가 펠릭스 골키퍼의 실수를 득점으로 연결한 것.

팽팽한 전반전을 마친 양팀의 경기 양상은 후반전에 완전히 갈렸다. 브라질은 제르손의 강력한 중거리 슈팅으로 역전했으며 세트 피스 상황에서 제르손과 펠레를 거친 공이 자이르지뉴가 연결하며 추가 득점에 성공했다. 스코어는 어느덧 3-1로 벌어졌으며 브라질은 줄리메 컵의 주인이 되기까지 20분이란 시간을 남겨둔 상태였다.

후반 종료 직전 브라질은 역대 월드컵에서 가장 멋진 골로 불리는 환상적인 묘기를 보여준다. 주장이자 오른쪽 풀백의 교과서로 불리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발끝에서 마무리된 이번 득점은 패스 플레이를 통해 아주리 군단의 카테나치오를 뚫기 시작한 카나리아 군단은 펠레의 패스를 받은 아우베르투가 강력한 중거리 슈팅을 득점으로 연결하며 4-1로 대승했다.

이로써 브라질은 줄리메 컵의 영구 주인이 됐으며 감독인 마리오 자갈로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월드컵을 제패하는 최초의 감독이 됐다. 줄리메 컵이 당시 멕시코 대통령인 오르다스의 손을 떠나 아우베르투에게 전해졌을 때, 관중과 선수들은 비바 브라질을 외치며 그들의 우승에 환호했다.

브라질 국내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으며 선수단의 입국 후에는 하나의 축제의 장이 됐다. 정치적 갈등 때문에 어수선했던 국내 사정도 나아졌으며 여태까지 그들이 세운 성과는 역대 최강의 팀으로 꼽힌다.


업데이트 하면서 이전 편에 이어 썼어요 ㅋㅋ

아마 올해 안에는 끝낼 수 있겠죠? ㅠㅠ 아무튼, 동영상이나 이런 건 태그 관광을 ㅠㅠ

http://safutbol.com/xe/index.php?mid=colomn

자세한 건 여기 있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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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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