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눈이 올테다.
어제의 찬바람에 치이고 베였던, 두꺼운 이불 속의 사람들은 자꾸 늦어져만 가는 아침을, 눈내리는 소리로 맞이할테다. 눈위의 바삐 그려진 여러 발자국은 총총거리며 자신의 주인을 따라다닐 것이다. 추운 날씨, 눈이오면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채 발만 보며 걸어간다. 사람들은 첫눈이 온다는 기상예보를 듣고도 곧 내릴 하얀 눈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다, 마침내 낙하하는 눈을 바라보며 제각기 감상에 젖는다. 신비한 감정을, 사랑의 감정을, 아니면 실연등 여러 기억하는 것들을. 소복히 쌓여가는 눈송이에서 많은 것들을 찾기 시작한다. 마치 떨어지는 눈이 나에게 속삭여서 그러하다는듯.
눈은 하얗고 차갑다.
눈은 하얗다. 눈은 본래 차갑지만 사람들은 그 반대로 그 속에서 따뜻함을 찾는다. 눈을 바라보며 어떠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든 그것이 슬픈 기억일지라도 좀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아마도 우리는 그것을 새하얀 도화지라 생각하고 여러 추억거리를 그리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눈이 오면 나도 모르게 기뻐하는 것 같다.
그리고 눈은 녹는다.
눈은 하얗지만 이내 그렇지 않게 된다. 눈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었던 사람들의 발에 밟히기 시작하고, 점점 눈은 그 빛깔을 잃기 마련이다. 발자국이 남고, 색이 섞이기 시작하고, 더 시간이 지나면 녹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색은 어둡게 변하고, 질척이는 비명을 지르다 사라진다.
어쩌면 라울은 이러한 눈 같을지도 모르겠다. 레알 마드리드의 하얀 셔츠만이 어울리던 선수여서 더욱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흰 셔츠를 입고 플레이하는 라울은 수많은 플레이와 골로써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던 선수였다. 또한 그라운드 위의 카피탄을 바라보면서 그가 바로 라울이기에 우리는 평안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마치 하나의 눈송이를 바라보듯이.
라울은 그런 선수였다. 어릴적부터 유럽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며 레알 마드리드 팬들에게 기쁨을 주는 선수였고,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리더쉽을 발휘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상징과 자존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는 호나우두와는 또다르게 이른 시간에 놀랄만한 커리어를 쌓은 선수였다. 그리고 이는 현재도 진행중이다.
전성기의 라울이란 선수는 투우사와 같은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그를 막기위해 달려드는 수많은 수비수들은 황소였다면 라울은 투우사였던 것이다. 그러한 장면에서 그는 수비수들을 속여가며 많은 골을 기록했다. 지금 예전의 동영상들을 다시보면, 그 많은 수비수들, 그들은 하얀 유니폼의 7번만 보면 달려드는 황소같이 보인다.
당시의 라울, 젊을적 그의 플레이를 다시금 보게되면, 지금의 많은 선수들을 바라보는 감정과는 다른, 신비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유독 라울을 편애해서일까. 나에게는 새하얀 유니폼을 입은 라울이라는 선수가, 바람결에 춤추듯 움직이는 눈과 같이 보인다. 무언가 아련하고, 다시봐도 기쁘게 만드는 플레이를 펼치던 선수가 바로, 나에게는 라울 곤잘레스라는 선수인 것 같다.
그러나 소복하게 쌓인 눈이 사람들 발에 밟히고 이내 녹아버리듯 라울은 서서히 그리고 급작스럽게 예전의 모습을 잃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팀 전술에 의해 가장 많은 피를 내어주면서 라울은 예전의 그만이 갖고 있던 빛을 잃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하얀 빛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점점 멀어져만 갔다.
타고난 축구 센스와 그것를 뒷받치는 그만의 기민함을 잃기 시작하면서, 라울이 그만의 하얀 빛을 잃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짓밟혀서 구정물이 되듯이 이때까지 라울이 가지던 위치는 온갖 비난으로 채워졌다. 퇴물, 레알 마드리드 부진의 원흉, 이기주의자, 심지어 스페인 대표팀의 트러블 메이커등 듣기 거북한 말로 그는 더렵혀졌다.
마음이 아팠다.
레알 마드리드의 팬이라면 아무래도 라울의 팬이 많은 편이다. 팀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했던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응원하게 되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레알 마드리드를 응원하며 라울을 좋아하지 않았던 팬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울의 팬에서만 한정짓자면 아무래도 타 선수를 응원하는 정도보다 유독 그에게만 얽매이는 경향이 있다. 집착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나도, 그중 한사람이다. 라울의 기량이 떨어졌다는 평이 지배적이었을 때부터, 다른 마드리디스타가 터뜨린 골보다도 라울이 터뜨린 골에 더 많이 기뻐했다. 또한 그가 큰 실수를 한게 맞는데도 불구하고 인정하기 싫은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라울의 실수를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엉뚱한 정곡을 찌르는 경우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라울이 비난받는 것이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었다.
라울을 변호하는 그 심정의 밑바닥에는 실타래가 꽤나 복잡하게 얽혀있었던 것 같다. 첫째는 전성기에 비해 떨어진 기량의 라울을 인정하기 싫었고, 둘째는 요몇년동안의 라울 마드리드는 유럽무대에서 실망스런 모습을 남겼다는 것이고, 셋째는 팀이 힘들때 '내가 응원했던 선수'가 망가졌다는 사실이 억울했으며. 넷째는 라울이 예전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는 것이다. 이 네가지 심정중 어떤 부분이 내 마음에서 더 많이 차지해서, 때때로 불필요하게 라울을 변호하게 되었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어정쩡한 마음때문에라도 라울을 응원하는 내 자신에게, 라울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화가 나곤 했다.
인정해, 라울은 예전 폼을 완전히 잃었어, 라고 내 자신에게 말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완강히 부정했지만 떠날 날짜를 받아놓아보이는 라울을 바라보며 점점 내 맘속의 실타래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영원히 그라운드에서 달리는 선수는 없다고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선수가 기량이 떨어져서 팀을 떠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거라는 생각이 내려놓은 자리에 천천히 부유하고 있었다. 포기와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는 떠났다.
사라진 것이다.
눈이 녹아내려 사라지듯이 라울이라는 이름이 적힌 하얀셔츠가 이제는, 없다. 레알 마드리드 경기를 볼때마다 나에게 응원할 열정과 기쁨을 주었던 그 라울 곤잘레스가 떠나버렸다. 나는 한없이 황량함만을 느낄 것 같았다. 슬프고 허전할 줄만 알았다.
하지만 사라진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녹아내릴 눈임에도 불구하고 눈 내리기 시작하면 감상에 잠기지 않던가. 그때 우리는 눈이 녹을 일따윈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 다만 떨어지는 눈 한송이, 한송이 바라보며 그것들이 속삭이는 각기 자신만의 추억에 귀기울이는 것이다. 그래서 함박눈이 내리는 풍경은 슬픔과 차가움보다도 따뜻함이 배어나오는 것 같다 말한다면, 내가 지나친 억지를 부리는 것일까.
내가 사랑하고 응원하던 라울은 레알 마드리드에서 떠났지만 내 마음속에 눈 한송이를 살며시 내려놓고 떠난 것 같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서 하얀 빛을 내며, 내가 라울 곤잘레스라는 선수를 기억하게 한다. 눈을 감고 라울이라는 선수를 기억하고, 그를 응원했던 감정과 그 과정에서의 많은 기쁨들과 수많은 감정들이 한데 묶여 따뜻하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없다해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나는 라울에게 더더욱 감사하다.
나는 라울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한동안 이 감사함은 계속 간직하게 될듯 싶다.
아무래도 이번에 눈 내린곳은, 바로 내 마음 속이니까.
이제는, 사람들 발에 밟힐 일은 없을테니까.
댓글 15
-
베컴 2010.10.24오랜만에 쓰시는글이네요! 흑 라울이 보고싶네요
-
쌀허세 2010.10.24료코님이네요!
휴가나오신건가... 몸건강히 잘 지내시는지요 -
레전드지주 2010.10.24간만의 료코님 글 역시나 포풍정독하였습니다ㅠㅠ
군생활 잘하고 계신지... -
Torres 2010.10.24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
Guti 2010.10.24헐 완전 감동의 글.. ㅠㅠ
-
Klod 2010.10.24와...글 진짜 잘쓰시네요
-
피피타 2010.10.24료코님 글 오랜만에 보네요! 역시 료코님글은 ㅎㄷㄷ 잘 읽었습니다.
-
날둥이와춤을 2010.10.24와우 ㅠ.ㅠ 정말 감동이에요 ㅠ.ㅠ
-
김승택 2010.10.24진짜 이런 감동의 글 쓰실수있는것도 부럽네요 ㅜㅜ
-
Kaka 2010.10.24감동의글이네요 ㅠㅠ
-
라울스톡허 2010.10.24몸 건강히 잘 있는지 궁금하네;
어디서든 화이팅. -
Beelzebub 2010.10.24시적인 글이시네요ㅠㅠ
-
내가짱이다 2010.10.24글진짜감독적이네요
-
[Madrid]미니 2010.10.24멋지네요.....와....
-
Karim Benzema 2010.10.24ㅜㅜㅜ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