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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타 비고토요일 5시

차범근의 전설

Gago N.Torres 2009.10.26 13:00 조회 2,745 추천 4




일본에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베스트 일레븐, 쯤 되는 위상의
일본 국내에서 잘 나가는 '주간 사커 다이제스트' 라는 잡지가 있어요.

그 잡지에 'great player'라고, 유명한 예전의 축구선수를 회상하는 코너가 있는데
6번째 특집에 차붐에 대해서 글이 실렸어요.


이 글을 적은 사람은, 쿤트 네쳐에요.
이 쿤트 네쳐란 선수는, 우리 레알에서도 몇년간 뛰었을 정도로
독일내에서 명성이 자자한 선수입니다. 독일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명으로 꼽히는, 어마어마한 분이죠.

또한 오래전부터 꾸준히 칼럼, 경기 해설등을 통해서
이미 그의 평론 실력은 자타공인 독일 최고의 축구전문가중 한명의
반열에 올려놓여있구요.


그리고 이 글을 번역하신 김유석이란 분은, 이미 국내 축구 커뮤니티 사상
최고의 두뇌로 추앙받는 분인데, 토탈 풋볼이라는 모 사이트에서
몇년에 걸쳐서 스타 클래식이라는 코너를 통해,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없었던
1990년 이전의 올드 플레이어를 회상하고 평가하는 코너를 통해
칼럼을 연재하신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p.s 몇년생이신지 모르겠는데, 1970-80년대 대한민국 대표팀 계보를 줄줄 읊으시는거 보면
진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날 정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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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회 쿤트네처의[Great Player 열전]

- 차범근 편-


세계 각지에서 차범근을 만날 때마다 그 시절에 왜 차범근과 인연이 없었
을까? 하고 자책하곤 한다.

그 시절이라고 하면 내가 함부르크SV의 매니져를 하고 있었을 때이다.
새로운 스트라이커를 영입해 전력을 강화하려고 했을 시기는 함부르크가
분데스리가 챔피언 타이틀을 지키고, 유럽컵 아테네 시합에서 유벤투스를
꺾고 난 바로 뒤였다.

스트라이커 후보로 거론 된 인물은 프랑크푸르트의 차범근과 장래성이 있는
젊은 독일선수 두 명이었다. 박력있고 운동량 풍부한 샤트 슈나이더와 뛰어난
드리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가운데, 측면 어느쪽에서 든 훌륭한 패스와
센타링을 구사할 수 있는 볼프람 푸트케가 바로 이 두 젊은 독일선수들이었다.

나는 차범근을 택하고 싶었다. 차범근은 당시 분데스리가 공격수 중에서 어느
누구보다 강하고 우수한 선수였다. 그 때 분데스리가는 세계 최강의 리그였다.

그러나 마음 한 부분에서 또 다른 꼬득임이 있었다.
'너는 이미 유럽 챔피언 팀 매니져로서 반년이란 세월을 보냈잖아! 팀에는
국제 경험 풍부한 선수가 남아돌 정도로 많이 있고..... 그러니 젊은 선수
둘을 택해라. 베테랑 선수들이 그 젊은 녀석들을 멋지게 키워 줄 것이다.'

그 후에, 그것이 큰 실수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현대 축구에 적응할 수 없었던
두 젊은 선수에 의해서 그토록 강했던 팀이 비참하게 망가져 버리고만 것이다.
함부르크는 이 후 우승은 물론, 우승 다툼 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 홀스트 후루베쉬와 랄스 바스돌프등의 공격진에 차범근을 끌어드려
페릭스 마가트와 만프레도 칼츠의 패스와 센타링을 받아 주었다면 함부르크는
3번째 리그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츠펠트와 에휀 베르크 콤비로 성공을 이룬 바이에른 뮌헨과 같은 황금기를
우리도 당시에 구가할 수 있었다고 지금도 나는 확신하고 있다. 나는 매니져로서
그것을 달성하지 못했다.
오로지 '장래성' 하나만 보고 차범근과 같은'안전패(安全牌)'를 버렸던 것이다.

차범근은 신뢰할 수 있는 선수의 표본이다. 차범근은 케빈 키건과 함께 분데스
리가를 대표하는 모범적인 외국인 선수였다. 컨디션의 기복이 거의 없었고,
지방의 친선 시합과 같은 게임에서 조차 전력을 다해 플레이했다.
당시 아시아 출신 선수가 그토록 오랜 기간에 걸쳐 세계의 제 1선에서 활약 한
다고 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차범근은 유럽에서 활약한 최초의 아시아인이었다. 차범근 정도라면 세계의 어느
클럽, 어느 공격진에 들어 가더라도 주전 멤버로 활약했을 것이다. 차범근은
골을 확실하게 터뜨렸을 뿐아니라 동료들에게 송곳과 같은 어시스트를 제공했다.
스트라이커로서 차범근은 흠잡을 때가 전혀 없었다.

현재까지 아시아에서 차범근 정도의 플레이어는 배출되지 않고 있다.
사실, 당시에 일본에는 가마모토 구시니게라는 훌륭한 센타포오드가 있었다.
데트마르 크라머가 놀랐을 정도로 재능있는 선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을 떠나 전혀 다른 문화권의 나라에서 프로 축구선수로 활약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현재 나카다 히데토시가 유럽에서 어느 정도의 레벨까지 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과연 나카다가 10년간 유럽 무대에서 대활약한
차범근과 같은 수준의 실적을 올릴 수 있을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덧붙여서 말하면, 차범근은 세계 축구 전문가들로부터 [20세기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선정됐다.

차범근은 플레이 면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동료들과 팬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아시아인인 차범근은 후에 브라질에서 독일로 건너 온 선수
들이 본격적으로 전파한 기독교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기독교 선교사로서도
활동한 차범근에게 영향을 받은 선수들, 브라질의 죠르지뇨, 파울로 세르지오,
또한 레버쿠젠 팀동료였던 제 호베르토 루치오라고 하는 선수등은 스타디움 안에
서도 늘 신앙의 모범을 보였다.

1980년의 일이었다. 레버쿠젠의 DF 유르겐 겔스돌프는 그 해 UEFA컵 챔피언에
오른 프랑크푸르트의 스트라이커 차범근에게 경기 도중, 등 뒤에서 심한 태클을
가해 큰 부상을 입혔다. 겔스돌프의 파울은 너무나도 잔인했다. 테레비를 통해
그 장면을 목격한 독일 축구팬들도 경악했다.

차범근 주치의는「제 2 요추 골횡 돌기부 골절」이라고 진단 내렸다.
차범근이 병원에서 선수 생활의 사활을 걸고 치료에 전념하고 있을 때 프랑크푸
르트는 매스컴을 통해 이와 같은 내용의 문서를 발표했다.
「차범근은 [증오가 아닌 용서] 라고 하는 기독교적 신념에 입각해 겔스돌프에
대한 형사 고발을 거부합니다.」라고.

이후 3 년 뒤, 차범근은 레버쿠젠으로 이적했다. 그 첫날 차범근은 겔스돌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 날 부터 둘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 무렵 있었던
인터뷰를 나는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도를 넘어선 강한 태클과 지져분한 플레이로 덤벼드는 상대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대처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차범근은 이렇게 답했다.
「그러한 상대에게는 '이것은 룰 위반이고 파울이다. 또한 품격없는 행위다' 라고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수들은 무시합니다.」라고.

품격있는 차범근에게 있어서는 '보복 행위' 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범근 처럼 스피드가 있으면 페널티 에이리어 안에서 그 민첩함을 살려 페널티킥
을 자주 얻어낼 수 있지 않았겠느냐? 라는 질문에 언제나 웃으면서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그런 행동은 안합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로서의 자세가 아닙니다.」라고.

차범근이 레버쿠젠에서 선수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독일의
어느 기자가 작별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메시지의 타이틀은 다음과 같다.

「수라장(修羅場)을 맨발로 뛴 10년. 그 수라장(修羅場)이라고 하는 곳은
바로 분데스리가의 페널티 에이리어 안이었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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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니 글에 오류가 있네요-_-;ㅋ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진출한 최초의 선수는 일본의 오쿠데라입니다.
유럽에서 최초로 성공한 아시아인,을 잘못 번역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차 붐이 뛴 클럽들의 순위

79~80 프랑크푸르트 9위(15승2무17패) 31경기 12골 0.38골 / 팀내 득점 1위
80~81 프랑크푸르트 5위(13승12무9패) 27경기 8골 0.29골 / 팀내 득점 1위
81~82 프랑크푸르트 8위(17승3무14패) 31경기 11골 0.35골 / 팀내 득점 1위
82~83 프랑크푸르트 10위(12승5무17패) 33경기 15골 0.45골  / 팀내 득점 1위
83~84 레버쿠젠 7위(13승8무13패) 34경기 12골 0.35골  / 팀내 득점 2위
84~85 레버쿠젠 13위(9승13무12패) 29경기 10골 0.34골  / 팀내 득점 2위
85~86 레버쿠젠 6위(15승10무9패) 34경기 17골 0.50골 / 팀내 득점 1위
86~87 레버쿠젠 6위(16승7무11패) 33경기 6골 0.18골  / 팀내 득점 3위
87~88 레버쿠젠 8위(10승12무12패) 25경기 4골 0.10골  / 팀내 득점 6위
88~89 레버쿠젠 기록 無

분데스리가 통산 308경기 98골 /역대 통산 득점 순위 44위



차붐은, 어느면에서는 과대평가를, 어느면에서는 과소평가를 받고 있는 선수에요.


지나치게 깎아 내리면서, 중하위권 클럽의 그저 그런 선수,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도 있고
반대로, 현재의 티에리 앙리, 라이언 긱스, 메시급의 세계를 뒤흔든 선수로 어느 정도는 과대평가를 하는 경향도 있구요.



차붐을 이야기 할때, 가장 많이 착각하는 부분이, 과연 '세계적으로 잘하는 선수'의 기준은 어디인가, 에 대해서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제시한다는 겁니다.

아넬카나 디에구 밀리토를 떠올려보죠.
현재 세계 축구계의 최고의 스트라이커를 이야기 할때 나오는 페르난도 토레스, 디디에 드록바, 에투, 즐라탄, 비야에 비해서 한발 정도 뒤쳐져 있는 퍼포먼스를 보이지만, 그들이 과연 세계적이지 못한 선수, 세계적으로 잘하지 않는 선수 인가, 라고 묻노라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마치 지단급이 되지 못하므로 구티는 평범한 선수다, 라고 폄훼하는 것과 똑같은 거에요.
구티는 세계 역사에 남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야말로 출중한 선수잖아요?



또한 혹자는, 86 월드컵에서의 무득점을 들면서 그를 폄훼하고는 하는데, 당시 모든 상대팀 클럽이, 한국을 차붐의 원맨팀으로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당시 수비전술이 차붐 전담 마크맨을 2명 두고 경기를 시작했다고 하더라구요.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같은 강호의 주전 수비수 2명이 전담 마크를 하는데, 뚫을 수 있는 선수가 있나요? 네스타, 잠브로타가 전담 마크를 하는데 천하의 호나우도라도 뚫고 경기를 지배할 수 있나요? 전담마크만 하는게 아니죠. 공이 차붐에게로 가면 전담마크맨 2명 + 근처에 있던 아르헨티나 선수도 달라 붙습니다. 즉, 우리가 2002년도에 했던 그 무시무시한 압박축구를 차붐은 혼자서 86년도에 맛보고 있었어요.



저희에게,

마드리드는 레알 마드리드가 먼저 떠오르는 도시죠? 우리에게 상징성이 크니깐요.
코드티 부아르는 드록바의 나라죠?


독일에서, 한국 하면 99% 'CHA BOOM?' 이라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위대했고, 유명했고, 올곧은 플레이어였어요.



차붐은, 독일에서 정말 한국의 이미지를 격상시키는데 제대로 한몫한 선수입니다.



저희도 알다시피, 백태클에 대한 규제는 94-98년도 사이에 강해졌어요. 즉, 그렇지 않고 백태클도 일반적인 태클로 용인받았던 80년대는 수비수들이 굉장히 더티했습니다. 그리고, 그 더티했던 수비를 차붐이 프랑크푸르트 시절에 당했었어요. 당시 상대 선수가 레버쿠젠의 겔스돌프 선수였어요. 아마, 이 부상으로 인해 차붐이 1년 가까이 결장하게 되고, 프랑크 푸르트 팬들 사이에서 겔스돌프에 대한 원한이 극심해진 나머지, 겔스돌프를 향한 살해협박 편지까지 배송될 정도였지요. 그럴때 차붐은 팬들의 사랑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면서도, 겔스돌프를 진심으로 용서한다, 라는 요지의 장문의 인터뷰를 남겼던 적이 있어요.

그리고 3년후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차붐에게 겔스돌프는 먼저 찾아가 사과를 구했고
그 이후 3년내도록, 차붐이 골 세레모니를 할때 가장 먼저 달려왔던 선수가 겔스돌프였다지요.
(위의 쿤트 네쳐의 본문에도 실려있습니다)



어떤가요?
예를 들어, 저희 k리그에 베트남 선수가 왔다고 칩시다.
그리고, K리그의 유명한 수비수가 베트남 선수에게 1년짜리 부상을 입혔는데
그 베트남 선수가 유려한 한국어를 펼치면서 ' 저는 그 수비수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용서와 화해를 청합니다.'라는 깔끔한 인터뷰를 남겼다고 해봐요.

그 선수에 대한 이미지, 베트남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지지 않을까요?
소위 말하는 국위선양의 대표적인 이미지지요.


감독으로써는, 어느정도 기대 이하의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건 사실이지만
분명한건, 선수로써의 차붐은 다에이, 나카타, 박지성, 오쿠데라같은 기라성 같은
아시아 초특급 선수가 넘지못했던 세계 일류로의 벽을 넘은 선수라는 거에요.




차붐에 대한 사실

- 차붐은 세계 탑5급의 최정상은 아니었지만 세계 정상급의 선수였다 : 차붐의 인터뷰 중, '칼 하인츠 루메니게를 볼때마다 좌절감을 느꼈다. 확실히 한수 아래라고 느꼈다.' 라는 구절이 있지만, 알벨다가 현역 시절 마켈렐레, 레돈도, 에메르손, 실바등의 후광에 가려졌다고 해서 세계적이지 않은 플레이어라고 폄훼하지 않는다. 


- 차붐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이적을 결심했던 순간, AC밀란, 바이에른 뮌헨, 함부르크등이 이적제의를 했었다. (밀란 , 뮌헨 : 지난 20세기 최고의 클럽들. 함부르크 : 당시 82 월드컵 주전 멤버 3명이 뛰고 있는 독일 최강의 강호 중 한팀) : 하지만 가족의 거취, 교육 환경, 신앙 문제등을 들어 독일에 남았다. (재미있는 인터뷰 구절을 발견했는데, 차붐이 말하길, AC 밀란이 아니라 인터 밀란이 제의를 했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갔을거라네요.)


- 독일에서 차붐의 귀화를 추진한 적이 있었다 : 이것 역시 사실. 인터뷰나 분데스리가 유명한 스타들의 발언등을 비추어 볼때, 상당히 성공에 근접해 있었지만, 차붐의 애국심은 결국 그를 1986 월드컵 대한민국 멤버로 이끌었다.


- 독일에서 차붐은 하나의 신화다 : 독일에 가 본, 많은 축구 전문가들은 꼭 이런 말을 한다. ' 차붐이 이정도의 위상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 포항 스틸러스 팬에게 라데는 하나의 신앙이며, 첼시에게 지안프랑코 졸라, 디디에 드록바 역시 하나의 신앙인것과 마찬가지.





로타로 마테우스(인터밀란의 전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90년대 주장) 曰 : 차붐을 낳은 어머니 한국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와 함께 독일 유니폼을 입고 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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