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ter_list
셀타 비고토요일 5시

반쯤 찬 물잔과 반쯤 빈 물잔

조용조용 2009.09.01 12:07 조회 1,977 추천 16
이거 한국에서도 쓰는 표현 맞죠? half full or half empty.
데포르티보전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일단 시즌이 다시 시작해서 너~~무 좋고요! (축덕인증;)
한시즌만에 팀이 얼마나 바뀐건지...새로 온 선수보다 기존 선수를 세는게 더 빠를 지경 -_-

초여름쯤에 피구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 때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자기가 뛰어본 팀 중에 레알 마드리드, 특히 베르나베우만큼 중압감이 심한 곳은 없다구요.
피구가 바르샤 외국인 주장까지 하고, 세기의 이적으로 돼지머리도 맞아봤고 -_-;
레알 다음에도 인테르에서 뛰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유럽 유수의 빅클럽들만 다닌 셈인데도,
'제일 부담되는 팀은 어디냐?' 물었더니 '압력하면 레알'라는 말이 바로 튀어나오더군요 -_-;;;
피구가 레알 올 때 만으로 약 28살. 선수로서도 황금기,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그런데도 레알에서 뛰는 부담감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이거지요.

그런 부담감을 개막전 카카에게서 어렴풋이 봤습니다.
그렇게 탐욕부리는 카카는 첨보는거 같아요. (나쁜 뜻으로 쓰는 탐욕 아님;)  
물론 죄다 들어갈만 한 슛팅이었는데 아깝게 살짝살짝 벗어나고 그러긴 했지만
공식 데뷔전에서 '뭔가를 보여주겠다'라는 초조함이 아주 그냥 이마에 써있더군요.

그러니 94디강의 사나이 날동이는 어떻겠습니다.
얘가 지금 호기있게 몸값을 증명해보이겠어 클럽 역사에 족적을 남기네 큰소리 땅땅치고 다니지만 
본인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부담감이 클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화제에도 많이 오르고 일찍 뜬 선수라 그렇지 이녀석 아직 24살이에요.
아무리 세계 최고의 선수로 상이라는 상은 모조리 휩쓸었다 해도 24살은 24살.  

그 외에도 팀의 대부분 선수들이 어리죠.
지난 시즌에 드렌테 엄청 야유받고 자신감 잃어서 경기에 출전 못했던 시기도 있었잖아요. 
그게 어떻게 생각하면 쟨 멘탈이 약해 이렇게 볼 수도 있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드렌테만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를 것 같은 아이가 그 지경이 될만큼 
SB의 중압감과 압력이 심하다는 말도 되거든요.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해외포럼에서 현지팬들의 데포르티보 관람기를 읽었는데요, 
역시 저질 수묵담채화 스트림으로 보는 것과 현장에서 보는건 느낌이 많이 다르겠죠. 
저희처럼 일생에 직관람 한 번 가볼까말까 하는 해외팬들이랑은 관점이 참 다르더라구요.

지난 시즌과 정말 달라진 점은, 
경기에 나선 모든 선수들이 그야말로 뭔가 잘해보겠다는 의지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날도가 뛰는 걸 본 관중들이 그 녀석의 열정과 투지에 반했다고. (캔유빌리브잇?;;)  
뭣보다 실제로 보면 진짜 바람같이 빠르다고 하네요.
로벤이 샤샤샥~ 하면서 예쁘게 뽈뽈뽈 볼을 몰고 가는 것도 빠르지만
날동이는 갑자기 휙~ 하고 튀어나가는데 완전 지금 뭐가 지나갔나 -_- 하는 수준이랍니다 ㅎㅎ
그리고 날도가 후반전에 강슛팅을 날려 경기장 광고판을 빵-하고 때렸는데
그 소리가 하도 커서 SB를 쩌렁쩌렁 울렸다고 합니다.
관중들이 도대체 뭘 삶아먹었길래 저런 힘이...하며 수군수군했다고...ㅋㅋㅋ

뭐 저도 홈에서 2실점이나 하고 슛팅 28개 날려서 달랑 3골 넣고;;;; 
불만을 말하자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어요.
어차피 새로 온 선수들 많아서 초반에 조직력 안맞는거야 충분히 예상한 바이니
어찌어찌 꾸역꾸역 승점 쌓아가다보면 서서히 손발도 맞고 베스트 포메도 윤곽이 드러나겠죠.

지난 시즌에 막판에 우리를 가장 힘들게 했던건, 
무관에 그쳤다는 것, 연패를 했다는 것보다 팀이 나아질 희망이 보이질 않는다는 거였어요.
리그 막판 몇 경기는 우스갯소리로 '이과인 땜에 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열심히 뛰지 않는 선수들, 줄부상으로 나가떨어지는 선수들, 자동문 열어주는 수비수들 
정말 의무감으로 본방 사수하던 경기들...경기 후 인터뷰도 번역하기 싫더군요.

선수들이 이적할 때 인터뷰에서 자주 보는 말이지만 '비전'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비전'이 없는 팀을 서포트하기는 쉽지 않거든요.  
예를 들어 지금 밀란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도
당장 데르비에서 대패를 해서, 당장 순위가 몇 위라서 그런게 아닐거에요.
팀이 앞으로 나아질거라는 '희망', 그리고 '비전'이 보이지 않는게 가장 팬들을 힘들게 하는겁니다.
(밀란을 예로 들어 죄송합니다;;; 다른 마땅한 예가 생각이 안나서 -_-;;)
  
그런 면에서 'Proyecto Florentino'라는 비전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행복한 거라 생각해요.
아르비와 알론소가 입단 직전에 마치 짜고 친 고스톱처럼 녹음기 틀었던 걸 기억하시나요. 
마드리드의 프로젝트는 인상적이다, 마드리드의 프로젝트는 야심차다.
벤제마도 이런 말을 했죠. 리옹에 1년 더 남으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회장이 직접 마드리드의 프로젝트를 설명해주는 것을 듣고 마음을 바꾸었다고요.  
선수들도 그 무엇보다 '비전'에 끌리는겁니다. 그래서 지금의 팀이 완성된 것이고요.

물론 비전은 비전일 뿐. 비전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법은 없죠. -_- 
게다가 현재 마드리드는 잘해야 본전; 못하면 가루가 되도록 까일 수 밖에 없는 현실...;;;
실제로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했기에 리스크도 그만큼 크고, 실패할 가능성도 상당합니다. 
첫번째 임기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정책이 이번에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고요. 

하지만! 세상 만사는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컵에 반쯤 물이 차 있을 때 반쯤 비었다고 보느냐, 아니면 반쯤 찼다고 보느냐, 
지금 어기적어기적 아직 손발이 안맞지만 앞으로는 좀 더 좋아지지 않겠어? 생각하느냐,
에이 또 공격수만 영입하고 달라진게 뭐야. 이번에도 뻔하지 뭐. 이렇게 생각하느냐.

각자의 선택이지만 저는 전자처럼 생각하려 합니다.
그래서 다음 경기, 또 다음 경기가 더욱 기다려지네요.
다음 경기에는 또 누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어떤 조합이 나올까.
첫경기보다는 수비가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날동이 돌파가 좀 늘었을까.
카카는 과연 데뷔골을 넣을 것인가. 이렇게 설레이며 볼 수 있는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어느 축덕님 말씀대로 축구 올해만 보나요.
질수도 있고 삽질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앞으로 발전할 '희망'과 '비전'이 있으니
저는 오늘도 국대 기간을 저주(?)하며 에스파뇰전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
  
format_list_bulleted

댓글 29

arrow_upward 레알마드리드 이적시장 최종정리 arrow_downward 바르카가 이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