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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피카목요일 5시

현재 레알단장인 프레드락 미야토비치에 대한 글

레알라울 2007.12.13 23:08 조회 2,953 추천 5

 

Predrag Mijatovic

 

 

1998년 5월 20일,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후반 65분! 32년을 기다려온 레알 마드리드의 아픔이 왼 발목 한 동작으로 치유되는 순간이었다. 검지 손가락을 들고 피치를 가로질러 뛰어온 그를 동료들과 코치들이 괴성을 지르며 반겼으나 그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있었다.


프레드락 미야토비치는 1969년 7월, 포도고리카라는 몬테네그로(유고 속)의 대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치과 의사. 17살 때 지역 팀인 티토그라드 선수로 두각을 나타낸 그에게 자국 명문 파티잔 베오그라드의 손길이 뻗쳤고, 1987년 세계 청소년 월드컵 우승팀 멤버였다. 이 당시의 유고 청소년 대표팀은 슈케르(전 레알),프로시넥키(전 바르쎌로나),보반(현 밀란) 등 초 호화 멤버들의 집합체였으며, 이들은 90년 대 유고슬라비아 축구의 전성기를 구가할 주인공들이었으나 정치적인 투쟁의 희생양이 되고만 것이다.

17골에 34어시스트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며 베오그라드를 유고 챔피언으로 이끈 그는1993년, 3백만 달러에 발렌시아로 이적, 3년간 맹활약을 펼쳤다.
95-96 시즌에 28골을 작렬 시키며 프리메라 리가 올해의 선수에 올라 9백만 달러의 이적료에 레알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그를 영웅으로 받들던 발렌시아 써포터들은
'Judas(배신자)' 라고 분통을 터뜨리며 그를 Judatovic 라고 부른 유감스러웠던 한때.

 

그리고, 그 98년 5월의 밤. 51,000 여명의 인파가 암스테르담 구장을 빠져나간 뒤, 5억 여명의 시청자들이 TV을 돌린 후, 동료들과 함께 팀 버스에 오른 미야토비치는 마침내 자신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선수 생활 중 가장 값지고 보람 있었던 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어느덧 수천 마일 멀리 깊은 잠에 빠져있는 아들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다. 안드레아 미야토비치(당시 3살)는 뇌 부위에 정상 이상의 유체가 고여 머리를 크게 만드는 수두증에 걸려있었던 것. 가족들에겐 말할 나위 없는 고통의 시간들. '이 골과 트로피는 우리 아들에게 바치는 것이다. 나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이 날을.'

레알에서 첫 시즌(96-97)을 보내고 있을 때 안드레아의 병이 발견되었고, 바로 응급 수술로 이어졌다. 아들의 곁에서 밤을 지샌 미야토는 심란한 마음을 가다듬을 곳이 없어 다음날 아침 레알의 트레이닝 구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며칠 후 중요한 경기가 다가오고 있었을 때.당시 사령탑을 맡고 있던 카펠로 감독(현 로마)은 어서 가족에게로 돌아가라고 말렸지만 결국 훈련에 참가하고 말았다.

3일 뒤, 바르쎌로나를 홈으로 불러들인 레알. 팀의 둘째 골을 넣은 미야토비치는 2:0으로 리드하고 있던 후반 78분, 교체되었다. 싼티아고 버나바우를 꽉 메운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안드레아! 안드레아!"를 외쳐댔고 카펠로 감독이 내민 손을 잡으며 눈물을 닦아냈던 장면은 뭐라고 표현할 수도 없다.
주장 페르난도 이에로는 경기 후 자신의 셔츠를 쥐어주며 쾌유를 빌었고, 레알은 두 점차로 바르카를 따돌려 우승을 하였다. 미야토비치는 14골을 기록.



1990년 월드컵에서 8강(대 아르헨티나 pk패배)에 오른 유고는 유로92 본선에 올랐으나 UN의 제재조치로 인해 덴마크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으며 94년에도 불참하게 된 후 98년에 재등장하였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등이 분리되 나감에 따라 청소년 대표시절의 여러 멤버들이 찢어지게 되는 아픔이 있었다.
대 네덜란드 16강전. 1:1의 팽팽한 상황에서 스탐의 파울로 페널티킥을 얻은 유고. 미야토비치의 킥이 크로스바를 강타한 후 결국 다비즈의 골로 패배하고 말았고, 이 실축을 챔피언스리그 결승골과 맞바꾸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물론 바꾸고 싶다. 그 대회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국민들에게 크나큰 중대사였고, 선수들이 거는 기대 또한 남달랐다."며 못내 아쉬워했었다.

고국의 불행은 끊이지 않았다. 유로 2000 예선이 진행되던 98-99시즌엔 나토(NATO)의 폭격이 강행되어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이에 대한 항의조치로 그는 레알의 라 리가 경기에 불참했던 것.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정말이지 그때 만큼 내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던 때도 없었다." 팀 동료들의 반응에 대해 그는 "그들은 이해해주었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나를 지지해줄 수는 없었던 상황이었고, 나도 이점을 이해했다."
미야토비치는 급기야 컨디션을 잃어버리게 된 후 당시 감독이었던 죤 토샥과의 불화로 98-99 시즌을 마친 후 피오렌티나로 이적하였으나, 잔 부상 등이 겹치며 지난 시즌엔 16경기/2골, 올 시즌엔 키에사와 누노 고메즈 등과 힘겨운 주전 경쟁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가 대표팀 54경기/23골을 기록중인 그는 유고가 가진 유일한 2002예선전(대 룩셈부르크)에서 선발 출장하였으며, 그의 팀 내 입지는 아직까지 절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만 33의 나이에 불행한 역사의 고국을 위해 마지막으로 몸을 날릴 미야토비치. 페널티 박스 안에서 재치가 넘치는 터치, 그의 본능적인 드리블과 득점력을 2002때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Profile
프레드락 미야토비치 [Predrag Mijatovic]
1969년 1월 14일 유고슬라비아 (Pogdorica) 출생, 177cm - 73kg

소속팀:
피오렌티나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셰도우 스트라이커)

유고슬라비아 리그 데뷔:
84-85 시즌
유고슬라비아 리그 경기/골:
163/51
프리메라 리가 경기/골:
194/85
세리에 A 경기/골:
16/2
세리에 A 00-01 시즌:
8/0 (01년3월5일 현재)
대표팀 데뷔:
1989년 8월 23일 (:핀란드)
대표팀 경기/골:
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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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에서 카펠로 감독이 내민 손을 잡으며 눈물을 닦아냈던 장면을 보고싶네요;

전시즌 카펠로가 레알감독이었을때 초기에 레알 부진했을때

미야토비치가 꾸준히 카펠로를 지지했던 이유도 왠지 이해가 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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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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